부루마불, 정말 모노폴리를 몰래 베낀 게임이었을까

명절 아침 세배가 끝나면 거실 상 위에 초록색 판이 펼쳐졌습니다. 주사위 두 개, 종이돈 뭉치, 그리고 서울·도쿄·파리·뉴욕이라고 적힌 작은 칸들. 1982년 5월 어린이날, 씨앗사가 내놓은 보드게임 부루마불은 이후 몇 년 사이 명절과 방학마다 온 가족이 밤늦도록 둘러앉게 만든 물건이 됐습니다.

텔레비전을 끄고 상 하나를 다 차지한 채, 사촌들과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던 그 저녁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른들도 처음엔 구경만 하다가 어느새 판 안으로 끼어들곤 했습니다.

아랍에미리트 호텔 로비에서 시작된 이야기

홍대 미대를 나온 이상배는 1978년 중동 건설 현장에 건축디자이너로 나가 있었습니다. 묵던 호텔 로비에 놓여 있던 게임이 모노폴리였습니다.

부동산을 사고, 건물을 올리고, 상대의 파산을 지켜보는 그 구조를 눈여겨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귀국한 뒤 그는 이 틀을 한국식으로 다시 짰습니다.

도시 이름은 세계 각국의 실제 지명으로, 통행료와 화폐 단위는 원화로 바꿨습니다. 이름은 아폴로 17호가 찍은 지구 사진 ‘블루 마블(Blue Marble)’에서 따왔습니다. 1980년대 초 일본식 외래어 표기가 흔했던 탓에 ‘부루마불’이라는 발음이 그대로 굳었습니다.

명절이면 펼쳐지던 거실 속 세계여행

짜장면 한 그릇이 500원 하던 해에, 부루마불 세계여행 표준판 가격은 8,300원이었습니다.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지만 명절 세뱃돈을 모아 사는 아이들이 있었고, 사촌들이 모이는 집에는 어김없이 한 세트씩 놓여 있었습니다.

주사위를 굴려 도착한 칸의 땅을 사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통행료를 받는 방식이었습니다. 뉴욕·파리 같은 비싼 칸을 먼저 차지하려고 순서를 기다리며 손을 만지작거리던 기억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형과 동생이 같은 편이었다가도 게임판 위에서는 순식간에 채무자와 채권자로 갈라섰습니다. 은행 역할을 맡은 사람이 종이돈을 세는 동안 다른 식구들은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판 위 도시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곤 했습니다.

판 위에는 무인도 칸도 있었습니다. 걸리면 몇 바퀴를 쉬어야 했는데, 다들 그 칸만은 피하고 싶어 주사위 눈을 손으로 가려가며 던지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황금열쇠 카드를 뽑아 예상치 못한 돈을 받으면 그날은 판 전체가 술렁였습니다.

뉴욕 한 칸에 걸린 파산 직전의 긴장감

주사위가 뉴욕 칸에서 멈추는 순간 방 안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상대가 이미 호텔까지 올려둔 땅이라면, 남은 현금을 다 세어봐도 통행료가 모자란 상황이 종종 벌어졌습니다.

땅을 저당 잡히거나 다른 식구에게 급전을 빌리는 임기응변이 오갔습니다. 게임 규칙상 파산하면 판에서 빠져야 했는데, 그 순간의 억울함 때문에 밤 열두 시가 넘도록 판을 새로 시작하자는 말이 나오곤 했습니다.

세계여행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 오간 것은 이역만리 도시 이름이 아니라 한 방 안에서의 자존심이었습니다. 그 다툼은 다음 날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히곤 했습니다.

은행 역할을 맡으려던 신경전

게임을 시작하기 전, 누가 은행 역할을 맡을지부터 눈치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은행을 맡으면 종이돈을 만지며 판 전체 흐름을 쥐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나이가 가장 많은 형이나 언니가 그 자리를 차지했고, 동생들은 대신 주사위를 먼저 던지는 순서를 양보받는 식으로 타협을 봤습니다. 사소한 규칙 하나까지 식구들끼리 정해가며 게임을 시작하는 과정 자체가 명절 놀이의 절반이었습니다.

정말 모노폴리를 몰래 베낀 게임이었을까

부루마불이 모노폴리를 참고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는 씨앗사도 숨기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표절인가 하는 부분인데, 게임의 규칙이나 진행 방식은 저작권법이 보호하는 대상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말판의 구체적인 디자인, 도시 이름의 배치, 카드 문구처럼 부루마불이 독자적으로 새로 짠 요소들은 모노폴리와 다른 결과물로 인정받았습니다. 훗날 넷마블의 모바일 게임 ‘모두의 마블’을 둘러싸고 벌어진 저작권 소송에서도, 법원은 순회형 부동산 게임 자체가 부루마불 이전부터 존재했던 장르라는 점을 짚었습니다.

부루마불은 모노폴리라는 서양 게임의 틀을 빌려오되, 원화 단위와 한국인이 좋아할 법한 도시 구성으로 다시 만든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베낀 게임’이라기보다는 ‘토착화한 게임’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해 보입니다.

판 위 세계지도가 유일한 여행이던 시절

서울, 도쿄, 홍콩, 파리, 뉴욕. 부루마불 판에 적힌 도시들은 대부분 이름만 들어본 곳이었습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이라, 비행기를 타고 그 도시에 실제로 가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니 판 위에서 뉴욕을 사고 파리에 호텔을 짓는 행위는 아이들에게 일종의 상상 여행이었습니다. 지도책에서만 보던 지명을 손으로 짚어가며 “여기 진짜 가보고 싶다”는 말을 주고받던 밤이 적지 않았습니다.

1989년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되면서 그 도시들은 더 이상 먼 이름이 아니게 됐습니다. 부루마불 판이 유일한 세계여행이던 시절은, 그렇게 조용히 저물었습니다.

아파트값이 오르던 시절과 겹친 우연

부루마불이 나온 1980년대 초는 서울 곳곳에 아파트 단지가 새로 들어서던 무렵이었습니다. 내 땅을 갖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 통행료를 받는다는 설정이 어른들 눈에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부루마불은 아이들만의 놀이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명절에 모인 삼촌·이모까지 판에 끼어들어 진지하게 땅을 사고팔던 풍경이 여러 집에서 비슷하게 반복됐습니다.

어른들이 진짜 부동산 이야기를 하다가도 아이들 판을 들여다보며 “여기 땅값이 제일 비싸다”며 훈수를 두는 일도 흔했습니다. 게임이지만 게임만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다른 보드게임은 없었을까

부루마불이 자리를 잡자 비슷한 방식의 게임들도 뒤따라 들어왔습니다. 인생의 굴곡을 주사위로 따라가는 ‘인생게임’,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쏘리 게임’ 같은 미국산 보드게임이 문방구와 완구점 진열대에 함께 놓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부루마불이 유독 오래 이름을 남긴 이유는, 다른 게임들과 달리 실제 도시 이름과 화폐 단위를 눈에 익은 것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낯선 규칙보다 익숙한 지명이 아이들을 더 오래 붙잡아 뒀습니다.

친구 집에 놀러 가서도 판이 있는지부터 확인하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판이 있는 집은 그 골목에서 은근히 인기 있는 집이 됐고, 방학 숙제를 미뤄둔 채 오후 내내 그 집 마루에 걸터앉아 있던 기억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습니다.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판 앞에서는 구분이 없었습니다. 인형 놀이를 하던 여자아이도, 딱지치기를 하던 남자아이도 부루마불 판 앞에서는 나란히 앉아 같은 규칙을 다퉜습니다.

지금 아이들에게 낯선 부루마불의 규칙

요즘 아이들에게 부루마불판을 보여주면 종이돈부터 낯설어합니다. 스마트폰 화면 위에서 손가락으로 밀면 끝나는 게임과 달리, 부루마불은 주사위를 던지고 돈을 직접 세고 카드를 뒤집는 손의 움직임이 게임의 절반이었습니다.

  • 말판 한 바퀴를 돌면 월급 명목의 돈을 받습니다
  • 도착한 도시의 땅을 사고, 그 위에 빌딩·호텔을 지어 통행료를 올립니다
  • 무인도·황금열쇠 같은 특수 칸에 걸리면 카드를 뽑아 지시를 따릅니다
  • 가진 돈과 땅을 모두 잃으면 게임판에서 빠집니다

이런 규칙을 처음 보는 세대에게는 낯설겠지만, 이 손맛 자체가 부루마불을 오래 기억에 남긴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앱으로 계산을 대신해주는 보드게임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종이돈을 직접 세던 그 번거로운 과정을 그리워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아이에게 옛날 판을 꺼내 보여주며 규칙을 설명하다 보면, 설명하는 쪽이 먼저 그 무렵으로 돌아가 있는 걸 느끼게 됩니다.

부루마불은 왜 아직도 팔리고 있을까

80년대 말 들어 보드게임 인기가 한풀 꺾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비슷한 게임이 여럿 나오면서 시장이 나뉘었고, 이후로는 컴퓨터·오락기 오락이 아이들의 시간을 가져갔습니다.

그런데도 부루마불이라는 이름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클래식판부터 컴팩트판, 지역 특화판까지 여러 버전으로 계속 나오고 있고, 2010년대에는 스마트폰 앱으로도 옮겨갔습니다.

씨앗사 계열 채널에는 지금도 새 버전의 설명 영상이 올라옵니다.

부루마불 세계여행 미니판 설명 영상 — 40년 전 규칙의 골격이 지금 판에도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세대를 겨냥한 K리그 에디션도 있습니다.

부루마불 K리그 에디션 게임 설명 영상 — 도시 대신 구단이 칸을 채운 최신판입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다락방 상자를 열면 귀퉁이가 닳은 초록 판이 접힌 채 나옵니다. 종이돈은 반쯤 없어졌고, 뉴욕 칸에는 누군가 그려 넣은 낙서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 판을 손에 쥐면 명절 밤, 이불 위에 엎드려 주사위를 던지던 손끝의 감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승부를 낸 기억보다 그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던 시간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부루마불이 남긴 거실 풍경

부루마불은 세계 지도를 보여주는 척했지만, 정작 아이들이 배운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돈을 세고, 협상하고, 때로는 형제와 다투다 화해하는 법.

모노폴리를 본떴다는 사실은 이제 흠이 아니라 그 시절의 방식으로 남았습니다. 외국 것을 그대로 들여오지 않고 우리 이름과 우리 방식으로 바꿔 놓았던 손길이 그 안에 있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뉴욕까지 열네 시간이면 닿습니다. 그래도 판 위에서 주사위를 굴리며 그 거리를 상상하던 밤의 감각은, 실제로 비행기를 타본 뒤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세뱃돈으로 산 판 하나가 명절마다 온 가족을 한자리에 붙잡아 둘 줄은, 이상배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을 겁니다.

여러분의 집에는 어떤 도시가 가장 먼저 팔리고 나갔는지, 그 판 위에서 어떤 다툼이 있었는지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