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화 박스 앞에서 동전을 쥔 직장인의 뒷모습, 1990년대 거리

삐삐가 울리면 왜 다들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갔을까

허리춤에서 짧게 삑, 소리가 났습니다. 점심시간 직장 복도든 대학 앞 분식집이든, 누군가 벨트 쪽을 내려다보면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제 허리를 더듬었습니다. 액정에 뜬 숫자를 확인한 사람은 동전부터 찾았고, 그다음 걸음은 거의 정해져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공중전화 박스였습니다. 삐삐라고 불린 무선호출기는 1982년 12월 15일 시험 호출이 울린 뒤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서비스가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부터 … 더 읽기

담장 넘는 교복 학생과 황금빛 교문

고교얄개, 하이틴 코미디 붐을 만든 그 시절 교실 풍경

교문 담벼락 너머로 책가방이 먼저 날아갑니다. 그 다음 검은 교복을 입은 남학생이 뒤따라 담을 넘습니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쫓아오지만 이미 골목 저편입니다. 1977년 초, 이런 장면 하나로 전국 극장가를 들썩이게 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고교얄개는 그해 1월 29일 개봉해 두 주 만에 관객 10만 명을 넘겼고, 최종적으로 25만 8천여 명을 불러모았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극장 간판까지 조흔파라는 … 더 읽기

어두운 경찰서 사무실에서 손수건을 든 채 창밖을 보는 형사의 뒷모습, 안방극장풍 유화 일러스트

수사반장, 온 가족이 범인을 추리하던 저녁은 왜 특별했을까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온 식구가 약속이나 한 듯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들었다. 누군가 “이번엔 누가 범인일까” 하고 운을 떼면, 옆에서 밥그릇을 치우던 손도 잠깐 멈췄다. 1971년 3월 6일 MBC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수사반장은 1989년 10월 12일까지 이어지며 총 880회, 순간 시청률 70%를 넘나든 국내 최초의 실화 수사극이었다. 수사반장이 처음 안방에 들어온 순간 1971년 봄, 흑백 화면 … 더 읽기

김현식 비처럼 음악처럼 시대 이미지

김현식, 그 허스키한 목소리가 남긴 짧은 전성기

늦은 밤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다 문득 걸걸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손을 멈추고 볼륨을 한 칸 더 올리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김현식이었습니다. 1980년 1집으로 데뷔해 1986년 3집 ‘비처럼 음악처럼’으로 30만 장 넘게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했고, 지병으로 1990년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난 가수입니다. 다방 스피커 사이로 퍼지던 그 목소리 1980년, 김현식의 이름이 처음 음반 크레딧에 … 더 읽기

문방구 진열장의 로봇 프라모델 상자들과 책상 위 조립 도구를 그린 1980년대 셀 애니메이션 스타일 일러스트

프라모델, 용돈 모아 로봇을 조립하던 그 시절 문방구

문방구 유리 진열장 앞에 쪼그려 앉아 백원짜리 동전을 세고 또 세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진열장 안에는 로봇 모양 상자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마음에 둔 상자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얼마인지 묻는 게 그날의 가장 중요한 용무였습니다. 프라모델은 1969년 서울 돈암동의 한 살림집 마당에서 시작됐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플라스틱 모형을 취미로 만들던 김순환 씨가 교편을 내려놓고 아카데미과학을 차린 … 더 읽기

선풍기 앞에 모인 가족의 여름밤

선풍기 있는 집이 부러웠던 여름, 그리고 선풍기병이라는 괴담

거실 한가운데 놓인 선풍기 앞으로, 온 식구가 슬금슬금 모여 앉습니다. 누군가 손가락 하나를 날개 앞에 갖다 대고 “아~” 소리를 냅니다. 그 옆에서는 누가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느냐를 두고 팔꿈치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 소란의 뿌리는 1960년 3월, 금성사가 설계 두 달 만에 완성한 국산 1호 선풍기 GS-12A(D-301)였습니다. 알루미늄 날개에 쇠파이프 몸통, 소비전력 35W짜리 이 기계 하나가 이후 … 더 읽기

머리띠 두른 뒷모습과 정글 그림자

람보가 유행시킨 머리띠와 나무칼, 그 시절 골목 풍경

동네 골목 끝, 나무막대 하나를 허리춤에 꽂은 아이가 이마에 헝겊을 질끈 동여매고 있었다. 지나가던 친구들은 짐짓 겁먹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장단을 맞췄다.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의 흔한 풍경이었다. 실베스터 스탤론 주연의 액션영화 람보(원제 First Blood)는 1983년 6월 17일 국내 극장에 걸렸다. 서울에서만 약 28만 명이 이 영화를 보러 갔고, 그 뒤로 몇 년간 이 이름은 아이들 … 더 읽기

저녁 노을 지는 농촌 집, 빛나는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은 가족을 그린 유화 일러스트

전원일기, 22년간 화요일 저녁을 지킨 양촌리 사람들

화요일 저녁 8시가 가까워지면 밥상을 물리던 손이 빨라지는 집이 있었습니다. 설거지는 광고가 나올 때 몰아서 해도 늦지 않았고, 채널을 두고 다투는 일은 그 시간만큼은 없었습니다. 1980년 10월 21일 밤, MBC가 첫 회를 내보낸 농촌 드라마 전원일기입니다. 2002년 12월 29일까지 22년, 1088회 동안 방송되며 국내 제작 드라마 가운데 가장 오래 이어진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안테나를 조금씩 돌려가며 … 더 읽기

가을밤 라디오와 턴테이블 실루옷

이용 ‘잊혀진 계절’, 해마다 10월 31일 라디오가 기억하는 노래

라디오 볼륨을 무심코 높인 순간, 낮은 전주 몇 마디만으로 계절이 바뀐 걸 느낀 적이 있을 겁니다. 시월 마지막 날 저녁, 어디선가 꼭 한 번은 흘러나오는 노래. 이용의 ‘잊혀진 계절’입니다. 1982년 2월 발표된 이 곡은 박건호가 가사를, 이범희가 곡을 쓰고 이용이 불러 그해 가요대상과 최고인기가요상을 안겼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하는 첫 소절 하나 때문에, 이 노래는 … 더 읽기

문방구 진열대의 코카콜라 요요와 운동장

코카콜라는 어떻게 요요 하나로 운동장을 접수했을까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몇몇 아이들이 운동장 한쪽으로 몰려나갔다. 누군가 요요 줄을 검지에 걸고 팔을 내리꽂자, 빨간 요요가 바닥까지 쭉 내려갔다가 손바닥으로 다시 튀어 올라왔다. 코카콜라는 1980년대 초반 자사 로고가 박힌 요요를 사은품으로 뿌리며 전국 단위 경연대회까지 열었고, 국민학교 운동장은 한동안 그 요요 하나로 들썩였다. 문방구 진열대를 채운 빨강, 초록, 주황 흰색 몸통에 빨간 뚜껑을 … 더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