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컬러TV, 삼성이 아니라 아남산업이었던 이유

전파상 진열장 앞을 지나다 걸음을 멈춘 적이 있을 것이다. 흑백 화면 사이로 유독 색깔이 도는 텔레비전 한 대, 그 위에 붙은 낯선 이름표 “한국내쇼날”. 삼성도 금성도 아닌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국내 최초의 컬러TV는 1974년 1월, 아남산업이 일본 마쓰시타전기와 합작해 만든 합작사 한국내쇼날에서 생산한 CT-201이다. 흔히 삼성전자가 최초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 기록은 다르다.

삼성이 아니라 왜 아남산업이었을까

지금은 이름조차 낯설지만, 아남산업은 한때 국내 전자산업의 한 축을 이끌던 회사였다. 원래는 자전거 부품을 만들던 회사였는데, 1968년 국내 최초의 반도체 회사로 변신하며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다. 그 회사가 일본 마쓰시타전기(지금의 파나소닉, 그 시절 상표명은 내쇼날)와 손잡고 세운 합작사가 한국내쇼날이다.

왜 하필 마쓰시타였을까. 국내 전자산업이 아직 걸음마 단계였던 그 무렵, 컬러 브라운관과 회로 설계 기술을 갖춘 곳은 거의 다 해외 기업이었다. 아남산업은 자본과 부지를, 마쓰시타는 기술과 부품을 대는 합작 구조로 컬러TV 생산에 뛰어들었다.

1974년 1월, 한국내쇼날은 컬러TV 1호기 CT-201을 생산했다. 그해 생산량은 2만9000여 대. 상설 전시관을 열자 컬러 화면을 구경하겠다며 5만여 명이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전시관 안 풍경을 떠올려보면, 사람들이 줄지어 서서 화면을 들여다보던 모습이 그려진다. 흑백 화면만 보던 눈에 색이 입혀진 사람 얼굴, 붉은 옷, 파란 하늘은 낯선 구경거리였을 것이다. 손으로 만져볼 수는 없어도 눈으로는 실컷 구경할 수 있는 전시였다.

그때 전시관을 다녀간 사람 중에는 기자도, 동네 아이들도, 외국인 바이어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같은 화면을 두고도 서로 다른 이유로 들여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그 컬러TV 대부분은 곧바로 컨테이너에 실려 항구로 향했다. 완성품 상당수가 동남아와 중동 등지로 나갔고, 국내 판매 몫은 애초에 계획에 없었다. 회사 입장에서는 수출 실적이 곧 성장이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정작 그 화면을 만든 공장 노동자들도 완제품을 자기 집에 들여놓을 수는 없었다. 만드는 사람과 쓰는 사람이 나라 안팎으로 갈려 있던, 지금 생각하면 묘한 시절이었다.

흥미로운 건 그 컬러TV를 정작 한국 사람들은 안방에서 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만들기는 만들었는데, 켤 방송이 없었다.

흑백TV 앞 저녁 풍경, 그 화면이 계속 흑백이었던 이유가 여기서 갈린다.

영상한국사 – 1970년대 컬러TV 개발과 수출

컬러TV는 있는데 컬러방송은 없었다

대리점 진열창 안 컬러TV는 국내 판매용이 아니라 전량 수출용이었다. 정부가 컬러 방송 자체를 막았기 때문이다.

이유를 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갔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주변에 남겼다고 전해지는 말이 자주 인용된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는 “흑백TV도 없는 사람이 많은데 그보다 훨씬 비싼 컬러TV가 나오면 없는 사람들은 더 비참해지잖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치를 조장하고 계층 간 위화감을 키운다는 것이 정부의 공식적인 반대 논리였다. 수출로는 벌어들이되, 안방까지는 들이지 않겠다는 계산이었던 셈이다.

1970년대는 새마을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흑백TV 보급률이 막 오르던 시기이기도 했다.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이 하나둘 살림에 들어오던 흐름 속에서, 컬러TV는 그보다 한참 앞서가는 사치품 취급을 받았다.

삼성전자도 이 무렵 움직였다. 1976년 컬러TV 자체 개발에 성공했지만, 이 역시 전량 수출용으로 묶여 있었다. 아남산업이 먼저 만들고, 삼성전자가 뒤따라 개발한 구도였는데 정작 국내에서는 둘 다 같은 벽 앞에 서 있었다.

1977년에는 국내 컬러TV 수출 물량이 11만 대를 넘어섰다. 한국내쇼날, 아남전자, 금성사가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해외 바이어들 사이에서는 한국산 컬러TV의 평판이 조금씩 쌓여가고 있었지만, 정작 그 제품을 만든 나라 안에서는 여전히 구경거리에 머물러 있었다.

영상한국사 – 컬러TV 시대의 개막

지금 세대에게는 이 시차 자체가 낯설 것이다. 제품은 진작 나와 있는데 방송사가 그 제품에 맞는 신호를 내보내지 않는 상황, 스마트폰은 있는데 통신망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면 조금 감이 올까.

여기서 삼성전자가 최초라는 오해가 자주 생긴다. 1980년대 들어 컬러TV 광고와 대리점 진열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쪽이 삼성·금성이다 보니, 그 이전 아남산업의 1974년 CT-201은 기억에서 밀려났다. 실제로는 국내 판매가 허용되기 6년도 더 전에 이미 국산 컬러TV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참고로 흑백TV로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 타이틀은 또 다르다. 금성사(지금의 LG전자)가 1966년 8월 ‘VD-191’을 내놓았다. 19인치, 가격은 6만8000원. 그때 쌀 스물일곱 가마 값에 맞먹었다고 하니, 웬만한 살림으로는 엄두 내기 어려운 사치품이었다. 삼성전자는 1970년 일본 산요와 합작해 흑백TV 생산에 뛰어들었고, 독자 개발은 1972년에야 이뤄졌다.

흑백TV는 금성사, 컬러TV는 아남산업이 먼저 손을 댔다. 두 회사 다 지금은 삼성이라는 이름에 가려져 잘 언급되지 않지만, 최초라는 타이틀만큼은 나란히 이 두 회사의 것으로 남아 있다.

1980년, 마침내 화면에 색이 들어오다

그 벽이 풀린 건 1980년이다. 8월, 정부가 국산 컬러TV의 국내 판매를 허용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1일, KBS가 수출의 날 기념식을 자연색 화면으로 내보내며 국내 첫 컬러방송의 문을 열었다. MBC도 뒤이어 컬러 정규방송에 합류했다.

대리점 진열창 안에만 있던 물건이 드디어 마당 안으로 들어온 셈이다. 아남산업이 CT-201을 만든 지 꼬박 6년 만이었다.

방송이 컬러로 바뀌었다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따라간 건 아니었다. 광고 필름 제작 기반이 미처 갖춰지지 않아, 상당수 광고는 한동안 흑백으로 방영되며 컬러 화면과 어색하게 섞여 있었다. 그래도 한 번 색이 들어온 화면은 되돌아가지 않았다.

KBS 오늘은 – 텔레비전 컬러 방송 시작 (1980.12.1.)

이때부터는 익숙한 이름들이 전면에 나선다. 삼성전자와 금성사가 앞다퉈 신제품을 내놓았고, 컬러TV는 곧 혼수 목록의 상위권을 차지했다. 아남산업이라는 이름은 그 화려한 전환기 뒤로 조용히 물러났다.

요즘 누군가에게 CT-201 이야기를 꺼내면 돌아오는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그런 모델이 있었어?” 하는 얼떨떨함.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모델이지만, 확인된 기록 안에서는 가장 먼저 나오는 이름이다.

더 이상 대리점 진열대에는 CT-201이 놓여 있지 않았다. 그 자리를 채운 건 삼성전자와 금성사의 신형 모델들이었고, 7년 앞서 화면에 색을 입힌 첫 모델의 이름은 점점 광고 카탈로그 밖으로 밀려났다.

그 시절에도 이런 오해가 있었을까

그 시절 사람들에게 “최초”가 누구인지는 사실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컬러TV를 처음으로 안방에 들여놓는 것, 그 자체가 중요했다. 최초 제조사를 둘러싼 이야기는 오히려 시간이 흐른 뒤, 검색이 익숙해진 요즘 세대가 다시 캐물으며 생긴 궁금증에 가깝다.

지금도 인터넷에 “국내 최초 컬러TV”를 검색해보면 삼성전자를 최초로 적어둔 글이 여전히 여기저기 보인다. 한 번 퍼진 오해는 정정하는 기사 한두 편보다 힘이 세다. 그럴수록 CT-201이라는 모델명, 한국내쇼날이라는 회사명은 기록으로라도 남겨둘 값어치가 있다.

그런 오해가 굳어진 데는 아남산업이라는 회사 자체가 이후 역사에서 조용히 저물었다는 사정도 있다. 외환위기 여파로 아남전자는 2000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반도체 사업 부문은 이후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반면 삼성전자는 그 사이 세계적인 가전 기업으로 자리를 잡았으니, 사람들 기억 속에서 “컬러TV는 삼성”이라는 등식이 자연스럽게 굳어진 셈이다.

아남이라는 이름이 지금 아주 사라진 건 아니다. 아남전자는 법정관리를 거친 뒤 의료기기 사업으로 업종을 바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컬러TV를 만들던 그 회사가, 지금은 전혀 다른 물건을 만들면서 이름만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기록을 뒤져보면 답은 비교적 명확하다. 1974년 아남산업의 CT-201이 먼저였고, 삼성전자는 그보다 늦게 출발해 지금까지 남았다. 둘 중 누가 더 잘했다기보다는, 누가 먼저였는지가 그냥 사실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전파상 유리창 안, 화면 속 인물의 옷깃이 붉게 보이는 텔레비전 한 대를 떠올리면, 그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던 발걸음들이 먼저 생각난다. 살 수도 없고 집에 놓을 수도 없는 물건이었지만, 그 색이 신기해서 자꾸 돌아가 보게 되는 그런 창문이었다. 안방에 그 색이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몇 해가 더 남아 있었다.

아남산업이 남긴 것

국내 최초 컬러TV를 만든 곳은 삼성전자가 아니라 아남산업이다. 1974년 CT-201로 시작했지만 정작 국내 방송은 1980년에야 열렸고, 그 사이 아남산업의 이름은 대중의 기억에서 희미해졌다.

지금은 사라진 이름이지만, 화면에 처음 색을 입힌 건 이 회사였다. 최초라는 타이틀이 반드시 가장 유명한 이름에게 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작은 회사의 역사가 조용히 증명하고 있다.

CT-201, 한국내쇼날, 아남산업. 세 이름 모두 낯설게 들릴 수도 있다. 그래도 화면에 처음 색을 입힌 건 분명히 이 세 이름이었다.

여러분은 한국내쇼날이라는 이름,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으신가요?

최종 업데이트: 2026-1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