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담벼락에 스프레이로 삐뚤빼뚤 그린 알파벳 한 글자가 자꾸 눈에 밟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학교 담장에도, 공사장 가림막에도 커다란 V자가 하나둘 번져나갔습니다. 그 글자의 출처는 미국 NBC가 1983년 5월 내보낸 SF 미니시리즈 브이(V)였습니다. 거대한 모선 50척이 지구 곳곳에 나타나 첨단 기술을 나눠주겠다며 접근했지만, 정체는 인간을 식량으로 노리는 파충류 외계인이었습니다.
외계인이 처음 지구에 나타난 순간
세계 주요 도시 상공에 거대한 원반형 우주선이 소리 없이 멈춰 섭니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호합니다. 방문자들은 스스로를 비지터(Visitors)라 불렀고, 화학물질과 첨단 기술을 나누는 대가로 지구 자원을 빌려달라고 제안했습니다.
제작자 케네스 존슨은 원래 이 이야기를 파시즘이 미국을 장악하는 정치 우화로 구상했다고 전해집니다. 방송사가 SF물을 원하면서 지구를 침공하는 외계인 이야기로 바뀌었고, 방문자들의 완장과 제복, 획일적인 구호는 그 흔적을 여전히 품고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이 하나둘 실종되고, 언론은 방문자를 찬양하는 보도만 내보내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열렬히 환영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서서히 의심이 번져갔습니다.
1983년 2부작이 먼저 나왔고, 이듬해 3부작 후속편 브이: 최후의 전쟁이 이어졌습니다. 반응이 나쁘지 않자 1984년 가을부터는 매주 한 편씩, 19부작 정규 시리즈로 확장됐습니다. 세 작품을 다 합치면 스물네 편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뜻밖에도 세균학이었습니다.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의 몸에서 붉은 박테리아를 찾아낸 저항군이, 그 균으로 만든 붉은 가루를 지구 전역에 퍼뜨려 방문자들을 몰아냅니다. 총이나 미사일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균이 최후의 무기가 됐습니다.
1984년 가을부터 시작된 정규 시리즈는 정치적 은유가 옅어지고 제작비마저 줄어들면서 초기 미니시리즈만 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도 국내에서는 1990년에 한 차례 더 재방영될 만큼 꾸준히 회자됐습니다.
안방극장으로 건너온 브이
국내에는 KBS1을 통해 1985년 여름 밤 시간대에 처음 소개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2부작 미니시리즈와 3부작 후속편이 며칠 사이 연속으로 편성됐다는 이야기도 함께 전해집니다.
이어 그해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KBS2에서 매주 저녁 시간대에 19부작 정규 시리즈가 방영됐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확한 요일과 시각은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져, 여기서는 단정하지 않습니다.
안방에 텔레비전 한 대뿐이던 집이 많던 시절이라, 저녁 밥상을 물리기 무섭게 온 식구가 브라운관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도노반 역의 마크 싱어, 줄리엣 역의 페이 그랜트 같은 낯선 서양 배우 이름이 성우 목소리에 실려 안방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지구인 편에 선 외계인 윌리 역을 맡은 배우 로버트 잉글런드는 훗날 전혀 다른 얼굴로 유명해집니다. 영화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살인마 프레디 크루거 역이었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그런 미래를 몰랐습니다.
사람 가죽 아래 숨겨진 얼굴
화면 속 다이애나는 매끈한 금발에 완벽한 미소를 지닌 방문자 지도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살아있는 기니피그를 산 채로 삼키는 장면이 방송을 탔습니다. 매끈한 인간 얼굴 아래 초록 피가 흐르는 파충류가 숨어 있었다는 사실이 그 한 장면으로 드러났습니다.
국내 방영분에서는 이 장면 일부가 순화돼 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래도 갈라진 뱀 혀와 초록빛 피, 독을 뿜는 설정만으로도 아이들 사이에서는 며칠씩 화제가 됐습니다.
친절하게 웃는 얼굴이 사실은 가면이었다는 발상 자체가 낯설고 서늘했습니다. 그 뒤로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외국인 배우 얼굴만 봐도 괜히 한 번 더 쳐다보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레지스탕스는 이 정체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몰래 카메라를 들이댔고, 방문자들은 그럴수록 언론을 더 세게 틀어막았습니다. 착한 얼굴과 무서운 진실 사이의 그 간극이 시리즈 내내 긴장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방문자가 다이애나처럼 잔인하지는 않았습니다. 윌리처럼 인간 편에 서서 진실을 알리는 데 힘을 보탠 외계인도 있었습니다. 같은 종족 안에서도 편이 갈린다는 설정이 이야기를 단순한 침공극 이상으로 만들었습니다.
V: The Original Mini-Series(1983) 공식 클립 — Warner Archive 채널
담벼락마다 번지던 V 사인
저항군 지도자 중 한 명인 에이브러햄이 붉은 스프레이로 벽에 커다랗게 V자를 그리며 “승리를 뜻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 장면 하나가 한국 골목까지 넘어와 낙서로 번졌습니다.
담벼락, 전봇대, 공사장 가림막 할 것 없이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때로는 몰래 챙긴 분필로 브이 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어른들 눈에는 그냥 장난스러운 낙서였지만, 아이들에게는 저항군의 암호를 흉내 내는 나름의 놀이였습니다.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이는 승리의 V 포즈도 이 무렵 부쩍 흔해졌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손가락 두 개가 올라갔습니다.
같은 반 친구를 향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이며 “우리 편”이라는 암묵적인 신호를 주고받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저 놀이였을 뿐인데도 그 순간만큼은 꽤 진지한 눈빛이 오갔습니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이 V자는 낯설지 않았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무렵 연합군이 승리를 뜻하는 손가락 표시로 즐겨 쓰던 기호였기 때문입니다. 세대를 건너 같은 손짓이 전혀 다른 이야기 속에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V: The Final Battle(1983) 공식 클립 — Warner Archive 채널
문방구 진열대를 채운 브이 상품들
학교 앞 문방구에는 브이 캐릭터가 그려진 껌과 학용품이 나왔습니다. 방문자 유니폼을 본뜬 아동복도 한동안 진열대 한켠을 차지했습니다.
공책 표지에는 은색 우주복을 입은 인물이나 붉은 V자가 그려졌고, 아이들은 그런 학용품 하나를 손에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친구들 사이에서 으쓱해했습니다.
교실에서는 근거 없는 소문 하나가 돌았습니다. 드라마 전체가 사실은 기자 도노반의 꿈이며, 냉혹한 외계인 다이애나가 실은 그의 아내라는 이야기였습니다. 확인된 설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이 드라마가 아이들 상상력을 오래 붙잡아 뒀다는 증거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정말 어린이들만 이 드라마를 봤을까
겉보기엔 아이들이 좋아할 SF물이지만, 실제로는 온 가족이 함께 보는 저녁 프로그램에 가까웠습니다. 채널 선택권을 쥔 아버지가 이 시간만큼은 별다른 불만 없이 함께 채널을 고정했다는 이야기도 여럿 전해집니다.
다음 날 학교에서도 화제는 이어졌습니다. 어젯밤 누가 정체를 들켰는지, 저항군이 어떻게 위기를 벗어났는지를 두고 쉬는 시간 내내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정규 시리즈에서는 외계인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엘리자베스도 등장합니다. 인간도 방문자도 아닌 존재로 자라나는 이 아이의 이야기는, 단순한 침공극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대목으로 종종 언급됩니다.
줄거리를 몰라도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지점도 있었습니다. 어느 회를 놓쳐도 다음 주 다시 켜면 저항군과 방문자가 여전히 싸우고 있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챙겨 보지 못한 아이들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만난 SF
1980년대 중반 한국은 크고 작은 정치적 격변을 지나던 참이었습니다. 획일적인 구호와 통제된 언론, 겉으로는 친절한 얼굴을 한 권력이라는 브이의 설정이 하필 그 무렵 안방에 도착했습니다.
거창하게 정치를 읽어내며 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그저 스릴 넘치는 외계인 침공극으로 받아들였고, 그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벽마다 번진 V자 낙서만큼은, 어른들 눈에도 예사롭지 않게 비칠 때가 있었습니다.
지금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들
브이, 최후의 전쟁, 정규 시리즈까지 합쳐 스물네 편. 그때는 이런 해외 드라마를 통틀어 외화라고 불렀습니다. 신문 방송란에도 흔히 등장하던 표현이었습니다.
더빙 목소리가 배우 얼굴보다 먼저 각인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원어 음성이나 자막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성우의 억양과 어조가 곧 그 캐릭터의 전부로 남았습니다.
미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브이는 종종 “미드의 원조”로 불립니다. 정작 이 드라마를 보던 아이들은 그런 계보 같은 건 몰랐습니다. 그저 다음 방송이 기다려졌을 뿐입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골목 어귀 담벼락 앞에 몰려 서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던 아이들이 떠오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진짜 우주선이 나타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다들 지구를 지키는 저항군이었다.
브이가 남긴 것
화려한 특수효과나 정교한 분장 없이도, 매끈한 얼굴 아래 숨은 정체라는 발상 하나로 브이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담벼락에 남은 V자와 문방구 진열대의 껌 봉지, 그리고 온 식구가 모여 앉던 저녁 시간까지 말입니다.
지금 다시 저 낡은 화면을 튼다면 특수효과는 어설프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담벼락 앞에서 느꼈던 은근한 긴장감만큼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그 시절 어떤 장면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도마뱀 얼굴이었는지, 담벼락의 V자였는지, 아니면 온 식구가 모여 앉던 저녁 밥상이었는지, 댓글로 그 기억을 나눠주셔도 좋겠습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