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한가운데 놓인 선풍기 앞으로, 온 식구가 슬금슬금 모여 앉습니다. 누군가 손가락 하나를 날개 앞에 갖다 대고 “아~” 소리를 냅니다. 그 옆에서는 누가 먼저 앞자리를 차지하느냐를 두고 팔꿈치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 소란의 뿌리는 1960년 3월, 금성사가 설계 두 달 만에 완성한 국산 1호 선풍기 GS-12A(D-301)였습니다. 알루미늄 날개에 쇠파이프 몸통, 소비전력 35W짜리 이 기계 하나가 이후 20여 년 동안 여름 저녁의 풍경을 바꿔놓았습니다.
선풍기가 없던 집은 부채로 버텼습니다
모든 집에 선풍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선풍기 없는 집은 밀짚부채나 종이부채를 손에서 놓지 않고 여름을 났습니다. 마당 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다 팔이 아프면 옆 사람에게 부탁하던 풍경도 흔했습니다.
선풍기 있는 옆집 마루에 슬쩍 걸터앉아 바람을 얻어 쐬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몇 분의 시원함이 유난히 크게 느껴집니다. 주인집 아이가 선심 쓰듯 풍향을 돌려줄 때의 그 우쭐한 표정도 함께 생각납니다.
동네 이발소나 구멍가게 앞에 선풍기가 돌아가면, 손님이 아니어도 잠시 그 앞에 서서 더위를 식히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선풍기 한 대가 가게 앞 평판을 좌우하기도 했습니다.
버스 안에서는 선풍기를 구경조차 하기 힘들었습니다. 창문을 활짝 열고 달리는 버스 안,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리는 그 바람마저 더위를 식혀주는 고마운 존재였습니다.
온 가족이 돌아가며 앉던 그 자리
선풍기 한 대로 온 식구가 여름을 나야 했던 집에서, 자리는 곧 서열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신문을 보는 쪽으로 바람이 먼저 갔고, 막내는 목이 좌우로 돌아가는 그 몇 초 사이의 틈새 바람을 기다렸습니다.
선풍기 목이 돌아가던 그 리듬을 떠올리면, 바람이 자기 쪽으로 올 때까지 숨죽이던 순간이 먼저 생각납니다. 날개 앞에 손가락을 슬쩍 대고 “아~” 소리를 내며 떨리는 음색을 만들던 장난도 어느 집에서나 비슷하게 되풀이됐습니다.
그 장난에 부모님 손바닥이 날아오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손가락이 날개에 닿을까 걱정하는 어른들 목소리는 여름밤의 공식 배경음 같은 것이었습니다.
선풍기 소리를 떠올리면 웅웅거리는 모터음과 함께 은근히 뜨거워지던 몸통의 열기, 오래 켜두면 살짝 풍기던 기름 타는 냄새도 같이 떠오릅니다. 밤새 돌아가던 그 소리는 시끄럽다기보다 오히려 잠을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선풍기 날개에 낀 먼지를 닦는 일은 늘 여름 초입의 연례행사였습니다. 겨우내 다락이나 창고에 넣어뒀던 선풍기를 꺼내 걸레로 닦고 콘센트를 꽂는 그 순간이,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됐다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등목을 하고 마루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맞던 순간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물기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바람을 맞으면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던 그 감각, 지금도 어렴풋이 남아 있는 분이 많을 겁니다.
선풍기 있는 집이 제일가는 부잣집이던 시절
골목 안에서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집은 한눈에 표시가 났습니다. 창문 너머로 들리는 낮은 웅웅 소리 하나에 동네 아이들이 슬쩍 마당까지 들어와 서성이곤 했습니다.
금성사가 만든 GS-12A는 사진기·냉장고와 나란히 물품세 2종 과세 대상이었습니다. 세금이 따로 붙을 만큼 값비싼 사치품으로 분류됐다는 뜻입니다. 냉장고를 처음 들여놓던 집의 부러움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전력 사정까지 발목을 잡았습니다. 정부가 여름철 제한 송전을 이유로 선풍기 생산·판매를 억제하는 지침을 내리면서, 개선판 D-302(GS-12B)는 나온 지 2년 만인 1963년 단종됐습니다.
전기가 부족해 선풍기조차 마음껏 못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기준으로는 쉽게 믿기지 않습니다.
옛날광고 금성 역풍선풍기 (옛날티비 : KBS Archive)
모양도, 색깔도 하나둘 다양해지던 무렵
1963년의 생산 중단 국면을 지나 60년대 후반부터 금성사는 선풍기 생산을 다시 늘려갔습니다. 이후 다른 가전 회사들도 하나둘 선풍기 제조에 뛰어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탁상용 스탠드형이 기본이던 초기 모델에서 벽걸이형, 천장에 다는 실링팬까지 형태가 늘어난 것도 이 시기입니다. 몸통 색도 하늘색, 크림색, 아이보리색 등으로 다양해지면서 각 집 거실의 분위기를 조금씩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머리 각도 조절, 상하 리프트, 타이머, 코드 감기 기능이 하나씩 붙은 것도 이 무렵부터입니다. 리모컨이 없던 시절이라 버튼을 직접 누르고, 손잡이를 돌려 각도를 맞추는 손끝 감각 자체가 선풍기를 다루는 법이었습니다.
날개를 감싸는 보호망의 무늬, 받침대의 곡선 하나까지 회사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이웃집에 새로 들어온 선풍기가 우리 집 것과 다른 모양이면 그 차이를 두고 아이들끼리 한참 품평을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목을 좌우로 돌리며, 타이머 소리에 잠들던 밤
이런 기능들이 하나둘 갖춰지면서 선풍기는 웬만한 가정의 필수품이 됐습니다. 여름 저녁이면 선풍기를 켜는 순서, 각도를 맞추는 손놀림 자체가 하나의 의식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더운 밤, 타이머를 한 시간 남짓으로 맞춰놓고 잠을 청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째깍거리던 기계음이 먼저 떠오릅니다. 그 소리가 뚝 끊기는 순간 방 안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지던 감각도 함께입니다.
선풍기 앞에 나란히 누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던 여름밤은 형제자매가 유독 가깝게 느껴지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선풍기병, 그 여름밤을 겁주던 이야기
문을 꼭 닫은 방에서 선풍기를 밤새 틀어놓고 자면 위험하다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어른들은 제법 심각한 얼굴로 그 이야기를 전하곤 했습니다.
선풍기가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한 1910년대부터 이미 신문에는 편리함과 함께 유해성을 우려하는 기사가 함께 실렸다고 전해집니다. 그 경고가 세대를 거치며 부풀려져 “선풍기 사망설”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습니다.
실제로는 논리적·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이야기입니다. 얼굴 정면으로 오는 바람에 숨이 막히는 듯한 느낌, 먼지 쌓인 날개 탓에 생기는 비염·기침 같은 흔한 경험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도시전설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문단속을 하고 선풍기 타이머를 맞추던 손길은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무섭다면서도 결국 선풍기 없이는 잠들지 못했던 그 모순이야말로 여름밤의 진짜 풍경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학교에서도, 동네 병원 대기실에서도 어른들은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눴습니다. 창문을 살짝 열어두거나 방문을 조금 틈을 두는 것이 예방법이라고 서로에게 알려주던 모습도 흔했습니다.
정작 여름이 시작되면 그 걱정은 며칠을 못 가곤 했습니다. 무더위 앞에서는 소문보다 당장의 더위가 훨씬 크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선풍기 틀어놓고 자면 죽는줄 알았던 시절 (옛날티비 : KBS Archive, 선풍기 괴담 편)
지금 아이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
요즘 아이들에게 “선풍기 한 대로 온 식구가 버텼다”고 말하면 잘 믿지 않습니다. 에어컨이 당연한 시대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국민학교”라는 말부터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지금의 초등학교를 가리키던 옛 이름으로, 1996년까지 쓰이다가 이후 초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그 교실 천장에 매달려 돌아가던 선풍기가 이 글에서 말하는 바로 그 풍경입니다.
선풍기 한 대 값에 사진기·냉장고와 나란히 사치품 세금이 붙을 정도였다는 사실, 여름철 전력이 부족해 정부가 선풍기 생산 자체를 억제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학교 교실에서도 선풍기는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천장에 매달린 선풍기 한두 대가 서른 명 남짓한 아이들의 여름을 책임져야 했으니, 창가 자리와 선풍기 아래 자리를 두고 벌어지던 신경전도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혼수품 목록에 선풍기가 오르내리던 이야기도 지금 세대에게는 낯설게 들립니다. 냉장고, 텔레비전과 함께 선풍기 한 대를 장만하는 것이 새 살림을 시작하는 기준처럼 여겨지던 때였습니다.
왜 하필 선풍기 앞자리 다툼이었을까
지금이야 방마다 에어컨이 있고 개인용 선풍기도 흔하지만, 그때는 바람 한 줄기를 두고도 순서를 정해야 했습니다. 귀한 것을 나눠 써야 했던 그 감각이, 형제자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을 유독 생생한 기억으로 남긴 것 같습니다.
선풍기 앞자리는 단순한 자리가 아니라 그날 저녁의 특권이었습니다. 누가 먼저 씻고 나왔는지, 누가 숙제를 먼저 끝냈는지에 따라 자리가 정해지기도 했습니다.
형이나 언니가 양보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제일 시원한 각도는 본인 쪽으로 돌려놓던 잔꾀도 흔했습니다. 그걸 눈치챈 동생이 뒤늦게 따지고 들면, 그날 저녁 거실은 한바탕 소란으로 끝나곤 했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선풍기 목이 이쪽으로 돌아오는 그 몇 초, 온 식구의 시선이 동시에 날개를 따라 움직입니다. 손가락 하나를 슬쩍 대고 “아~” 소리를 내던 아이는 곧바로 등짝을 얻어맞고, 타이머는 째깍째깍 밤을 향해 줄어듭니다. 창밖 골목 어딘가에서도 비슷한 웅웅 소리가 들려오고, 그 소리들이 뒤섞여 여름밤은 그렇게 저물어갑니다.
선풍기가 남긴 것
선풍기 한 대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자리싸움과 장난, 그리고 근거 없는 괴담까지 — 이 모든 것이 결국 그 여름을 함께 견뎌낸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선풍기 있는 집을 부러워하던 마음도, 밤새 켜두면 위험하다던 걱정도 지금 보면 다 나름의 진심이었습니다.
바람 한 줄기가 이렇게까지 소중했던 여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에어컨 리모컨을 아무렇지 않게 누르는 요즘 기준으로는 짐작하기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그 시절 선풍기와 관련해 어떤 기억이 남아 있으신가요. 손가락으로 날개를 만지던 장난이었을 수도, 타이머 소리에 잠들던 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