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볼륨을 무심코 높인 순간, 낮은 전주 몇 마디만으로 계절이 바뀐 걸 느낀 적이 있을 겁니다. 시월 마지막 날 저녁, 어디선가 꼭 한 번은 흘러나오는 노래. 이용의 ‘잊혀진 계절’입니다. 1982년 2월 발표된 이 곡은 박건호가 가사를, 이범희가 곡을 쓰고 이용이 불러 그해 가요대상과 최고인기가요상을 안겼습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을”로 시작하는 첫 소절 하나 때문에, 이 노래는 지금도 해마다 10월 31일이면 전파를 탑니다.
이 곡 하나에는 가수를 몇 번이나 바꿀 뻔했던 사연, 계절 하나를 통째로 옮겨야 했던 사정이 겹겹이 숨어 있습니다.
국풍81 무대에서 시작된 이름
이용, 1957년생, 지금도 가요무대 단골 출연자로 통하는 그 목소리. 처음 이름을 알린 건 ‘잊혀진 계절’이 아니었습니다. 1981년 여의도에서 열린 국풍81 젊은이의 가요제, 그 무대에서 ‘바람이려오’로 금상을 받으며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관제 행사라는 논란이 뒤늦게 따라붙긴 했지만, 그 무대가 한 신인 가수의 출발점이었던 건 사실입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 개국 이래 최대 축제, 국풍81이 감춘 것 (KBS 230507 방송)
‘바람이려오’는 그해 가요톱10과 라디오 인기가요 순위표에 몇 주씩 이름을 올렸습니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신인이 순식간에 안방까지 얼굴을 알린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예능 프로그램 하나로도 순식간에 유명해지지만, 그때는 가요제 한 번, 라디오 순위표 몇 주가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바꿔놓기도 했습니다. 교복 차림으로 라디오 앞에 붙어 앉아 순위 발표를 기다리던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이듬해 첫 정규 음반을 낼 때만 해도, 이 신인의 이름이 이후 40년 넘게 매년 10월 라디오를 채우게 될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손에 쥔 건 갓 나온 앨범 한 장과 다음 무대에 대한 걱정뿐이었을 겁니다.
그 시절 신인 가수의 앨범 재킷은 사진관에서 찍은 정장 차림 사진이 전부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뮤직비디오도, SNS 프로필도 없던 때라 팬들은 그 사진 한 장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만으로 한 사람의 이미지를 완성해야 했습니다.
원래 이용의 노래가 아니었다는 사실
‘잊혀진 계절’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작사가 박건호는 이 노랫말을 원래 자신을 도와주던 무명 가수 장재현에게 줄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1982년 여름, 박건호가 신장염으로 갑작스레 입원하는 사이 작곡가 이범희가 이 곡을 가수 조영남에게 넘겼습니다.
조영남은 실제로 녹음까지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여러 사정으로 발표되지 못했고, 레코드사 사장이 마침 신인 가요제 출신으로 스튜디오를 드나들던 이용을 떠올려 그에게 이 곡을 맡겼습니다.
누구 손을 거칠 뻔했는지를 알고 다시 들으면, 익숙한 전주 하나가 조금 다르게 다가옵니다. 결국 노래의 주인은 마지막에 마이크 앞에 선 사람이 됐습니다.
병상에 있던 작사가가 자기 이름으로 나올 줄 몰랐던 노래가, 몇 십 년 뒤에도 자신을 대표하는 곡으로 남을 거라고는 그 여름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조영남에게 넘어갔던 녹음본은 정식 발표되지 않은 채로 남았습니다. 같은 멜로디, 같은 가사가 다른 목소리로 세상에 나왔다면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잊혀진 계절’의 분위기도 전혀 달랐을지 모릅니다.
구월에서 시월로, 한 달 늦어진 밤
이 노래에는 또 하나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가사는 ‘구월의 마지막 밤’이었습니다. 작사가 박건호가 비 오는 9월의 어느 밤, 한 여인과 헤어졌던 개인적 기억에서 나온 문장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음반 발매가 한 달 늦춰지면서 가사도 함께 손을 봐야 했습니다. ‘구월’이 ‘시월’로 바뀐 건 그런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예정대로 나왔다면 이 노래는 지금쯤 9월 말 저녁을 채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방 구석 자리, 신청곡을 적어 디제이에게 건네던 손님들 사이에서도 계절이 바뀌는 밤이면 유독 많이 나오던 곡이었다고 합니다. 정확히 누가 제일 먼저 신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밤의 공기만큼은 여러 기억 속에서 비슷하게 남아 있습니다.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몇 시간을 눌러앉아 신청곡 차례를 기다리던 시절, 원하는 노래가 걸리는 순간의 반가움은 요즘의 검색 한 번과는 무게가 달랐습니다. 마침내 전주가 흘러나오면 옆자리 낯선 사람과도 눈빛을 주고받게 되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왜 하필 시월의 마지막 날에만
다른 히트곡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방송 편성이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잊혀진 계절’만은 다릅니다. 첫 소절부터 못 박듯 날짜를 박아놓았기 때문입니다. 10월 31일 저녁이 되면, 라디오 프로그램마다 이 노래를 트는 게 거의 관례처럼 굳어졌습니다.
이용 – 잊혀진 계절 [가요무대/Music Stage] (KBS 241021 방송)
한국갤럽이 조사한 ‘가을하면 생각나는 노래’ 설문에서도 이 곡은 상위권에 꾸준히 이름을 올립니다. 발표된 지 40년이 넘었는데도 순위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이 오히려 눈에 띕니다.
매년 같은 날, 같은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온다는 것. 요즘처럼 알고리즘이 다음 곡을 골라주는 시대에는 오히려 낯선 풍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노래만큼은 그 자리를 아직 지키고 있습니다.
연말 가요대상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과 함께 이 노래를 부르던 모습을 기억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온 가족이 거실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그해 인기가요 순위를 함께 지켜보던 시절, 이 노래가 불릴 때면 유독 조용해지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나훈아, 김범수, 국카스텐 등 세대를 넘나드는 여러 가수들이 이 곡을 다시 불렀습니다. 원곡을 넘어서겠다는 욕심보다는, 계절이 돌아올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부르고 싶은 노래였기 때문일 겁니다.
퇴근길과 술자리, 그 사이 어딘가에서
단풍이 한창 물들다 지는 시기, 퇴근버스 창문 너머로 낙엽이 날리는 걸 보며 이 노래를 떠올린다는 분들이 많습니다. 굳이 라디오를 켜지 않아도 계절 자체가 전주처럼 느껴지는 노래입니다.
노래방 마지막 곡으로 이 노래를 고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분위기가 얼큰해질 무렵 누군가 번호를 누르면, 시끄럽던 자리가 잠깐 조용해지곤 했습니다.
가요제 무대 위 스무 살 신인이 부르던 노래가, 세월이 흐르며 어느새 계절을 알리는 신호 같은 노래로 자리를 옮겨간 겁니다.
사무실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야근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같은 노래를 듣는 것만으로 그 계절을 함께 지나는 기분이 들었을 겁니다.
가요제라는 무대가 낯선 세대에게
지금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만, 1970~80년대에는 국풍81 같은 대형 가요제 한 번이 신인 가수의 데뷔 무대이자 유일한 발판이었습니다. 방송 몇 번보다 가요제 수상 하나가 더 확실한 통행증이었습니다.
레코드 가게도, 스트리밍도 지금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새 앨범이 나오면 다방과 라디오, 레코드점 스피커를 통해서만 소문이 퍼졌고 그마저도 며칠은 걸렸습니다.
레코드점 진열대 앞에서 앨범 재킷을 한참 들여다보다 주머니 사정을 가늠하던 손님도 많았습니다. 한 장을 사면 그 노래를 몇 달이고 되풀이해 듣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원하는 곡만 골라 듣는 지금의 재생 목록과는 감각 자체가 달랐습니다.
지금도 라디오에 앉아 있는 목소리
이용은 지금도 라디오 프로그램에 종종 얼굴을 비칩니다. 2025년 10월 31일에도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잊혀진 계절’이 발매 43년을 맞았다는 이야기를 직접 전했습니다.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함께 나이를 먹었다는 뜻입니다.
가요무대나 콘서트7080 같은 프로그램 무대에 서면, 지금도 이 노래를 청해 듣는 관객들이 있습니다. 신인 시절의 목소리와는 다르지만, 그 자리에서만큼은 여전히 같은 계절을 부르고 있습니다.
객석에 앉은 관객 가운데는 이 노래를 처음 듣던 해의 자신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무대 위 목소리도, 객석의 얼굴도 세월만큼 바뀌었지만 흘러나오는 멜로디만은 그대로입니다.
당시 국풍81 현장을 채웠던 수십만 인파와 지금 가요무대 방청석의 조용한 박수 사이에는 40년이 넘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무대의 크기도, 관객의 반응 방식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다락방 속 한 장면
시월 끝자락, 창문 틈으로 들어오던 찬 바람과 함께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다 우연히 걸린 전주. 볼륨을 낮췄다가 다시 슬며시 높이던 손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그 밤 잠들기 전 창밖을 오래 바라봤고, 누군가는 그냥 이불을 끌어올렸습니다. 노래는 삼 분 남짓이었지만, 계절 하나가 통째로 지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용 – 바람이려오 [콘서트7080] (KBS 2009.06.14 방송)
잊혀진 계절이 남긴 것
국풍81 무대의 신인 가수, 원래 다른 가수에게 갈 뻔했던 노래, 한 달 늦어진 발매로 바뀐 가사 한 줄. 이 세 가지가 겹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잊혀진 계절’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노래 한 곡이 이렇게 여러 갈림길을 지나 우리 귀에 닿기까지, 정작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알든 모르든, 10월 31일 저녁이면 라디오는 어김없이 이 노래를 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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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에게 시월의 마지막 밤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으신가요. 라디오에서 이 노래가 나올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있으신가요. 올해 10월 31일에도, 아마 어느 채널에선가는 이 노래가 흘러나올 겁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