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놀이터 한가운데서 한 아이가 두 팔을 X자로 교차시키고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돕니다. 몇 바퀴를 돌고 나면 표정부터 달라져야 했습니다. 원더우먼이 되는 순간이었으니까요. 원제 Wonder Woman은 1975년 11월 미국 ABC에서 파일럿으로 첫 방송됐고, 국내에는 1977년 무렵 동양방송(TBC)을 통해 소개됐습니다.
만화 속 캐릭터가 안방으로 들어오기까지
원더우먼은 텔레비전에서 처음 태어난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1941년 미국 DC코믹스 만화로 먼저 등장해, 이미 수십 년간 만화 속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 오랜 만화 캐릭터를 실사로 옮기는 작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도 몇 차례 영상화 시도가 있었지만, 린다 카터가 맡은 이 판본에 와서야 비로소 대중적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파일럿에서 시작해 방송사를 옮겨 다닌 이야기
1975년 ABC가 내보낸 첫 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었습니다. 아마존의 공주가 미군 조종사를 구하며 나치 독일과 맞서 싸우는 설정으로 시작해, 반응이 좋자 이듬해 정규 편성까지 받았습니다.
정작 두 번째 시즌부터는 사정이 복잡해졌습니다. ABC가 후속 시즌 편성을 망설이는 사이, 제작사 워너브라더스는 이 드라마를 CBS로 옮겼습니다. 배경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70년대 현재로 통째로 바뀌었습니다.
여주인공 다이애나 프린스는 이제 정보요원 스티브 트레버와 함께 방첩기관(IADC) 소속으로 활동합니다. 공교롭게도 새 스티브 트레버는 예전 스티브의 아들이라는 설정으로, 배우 라일 왜고너가 부자를 함께 연기했습니다.
같은 주인공, 같은 배우인데 시대 배경 전체가 바뀐 드라마는 흔치 않았습니다. 국내에는 이런 방송사 이동 사정까지 자세히 알려지진 않았습니다. 그저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얼굴을 기다렸을 뿐입니다.
첫 방송 반응이 예상보다 좋게 나오자, 방송사는 곧바로 한 시간짜리 특집 두 편을 추가로 편성했습니다. 그 반응도 나쁘지 않아 정규 시리즈로 이어졌습니다.
팔찌 두 개와 황금 올가미
다이애나 프린스는 평범한 정보요원으로 낮을 보내다가도, 위기가 닥치면 제자리에서 몸을 회전시켜 원더우먼으로 바뀝니다. 손목에 찬 팔찌는 날아오는 총알을 그대로 튕겨냈고, 허리에 감은 올가미는 걸린 사람마다 진실만 말하게 만들었습니다.
무기가 아니라 방어와 진실이 힘의 상징이라는 점이 다른 영웅들과 달랐습니다. 주먹과 총, 첨단 장비로 문제를 해결하던 그 시절 남자 영웅들 사이에서, 원더우먼은 막아내고 캐묻는 쪽이었습니다.
투명 비행기까지 몰고 다니는 아마존 공주라는 설정도 낯설고 신기했습니다. 그냥 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비행기 안에 앉아서 난다는 발상 자체가 이미 별났습니다.
평소에는 안경을 쓰고 서류를 나르는 평범한 직원이었다가 순식간에 영웅으로 바뀐다는 이중생활 설정도 아이들 눈에는 흥미로운 지점이었습니다. 평범한 얼굴 뒤에 전혀 다른 존재가 숨어 있다는 상상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놀이였습니다.
TBC 국내 방영판 오프닝 화면 — 옛 방송 기록 아카이브
번쩍이는 빛과 회전, 그때의 변신 특수효과
다이애나가 제자리에서 도는 순간 화면에는 강한 섬광 효과가 겹쳐졌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단순한 조명 트릭이지만, 그때는 그 짧은 빛 하나가 진짜 마법처럼 느껴졌습니다.
회전이 끝나면 옷차림이 통째로 바뀌어 있는 장면도 매회 반복됐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옷이 바뀌는지 궁금해하며 화면을 몇 번이고 되짚어보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정교한 컴퓨터그래픽이 없던 시절, 편집과 조명만으로 만든 이 짧은 순간이 시리즈 전체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남았습니다.
동네 아이들 중에는 손거울에 손전등을 비추며 그 섬광 효과를 흉내 내보려는 이도 있었습니다. 물론 화면 속처럼 그럴싸하게 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토요일 저녁, 안방을 채우던 얼굴
국내 방영은 동양방송(TBC)이 맡았습니다. 정확한 방영 요일과 시간대는 자료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지는데, 토요일 저녁 편성이었다는 기록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더빙판 주제가는 가수 진미령이 한국어로 불러 방송을 탔습니다. 저 전주가 흘러나오면 다른 방에 있던 식구들까지 슬금슬금 거실로 모여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지금은 사라진 방송사인 동양방송은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KBS에 흡수됐습니다. 그래서 원더우먼을 떠올리면 드라마 내용보다, 그 시절 채널 자체와 화면 전환 방식이 함께 떠오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자아이들의 첫 변신 놀이
골목이나 교실 뒤편에서 여자아이들이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놀이가 유행했습니다. 팔목에는 머리끈이나 고무줄을 팔찌 삼아 끼우고, 허리춤에는 리본이나 끈을 둘렀습니다.
남자아이들이 전격 Z작전의 손목시계나 6백만불의 사나이 효과음을 흉내 내던 것처럼, 여자아이들에게는 원더우먼의 회전 동작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게도 마음껏 따라 할 영웅이 하나 생긴 셈이었습니다.
학교 앞 문구점에는 원더우먼이 그려진 공책과 필통도 나왔습니다. 팔찌를 든 자세, 머리에 쓴 별 모양 티아라가 그림 속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고무줄 두 개를 양쪽 손목에 채우고 “총알 막아봐”라며 서로 장난치듯 부딪쳐보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진짜 총알이 날아올 리 없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다들 꽤 진지했습니다.
머리띠 하나를 이마에 두르고 “나도 공주다”라며 으스대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색종이를 별 모양으로 오려 붙인 머리띠를 손수 만들어 쓰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옆집 언니가 마당 한가운데서 팔을 교차시키고 빙그르르 돌던 모습이 떠오른다. 먼지가 살짝 일었을 뿐인데도 다들 숨죽이고 그 순간을 지켜봤다. 다 돌고 난 뒤 머쓱하게 웃던 얼굴까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미스 월드 소문까지 낳은 얼굴
주연을 맡은 배우 린다 카터는 미국 애리조나 출신으로, 1972년 미스 월드 미국 대표로 뽑힌 이력이 있었습니다. 배우 활동이 순탄치 않던 시기에 이 배역을 만났습니다.
국내에서는 그녀의 외모가 워낙 화제가 되면서, 사진 한 장만으로 미스 월드에 뽑혔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떠돌았다고 전해집니다. 확인된 사실이라기보다, 그만큼 화제성이 컸다는 방증으로 남아 있습니다.
영웅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배우의 얼굴 자체가 화제였다는 점은 다른 외화 시리즈와 비슷했습니다. 소머즈의 린제이 와그너, 6백만불의 사나이의 리 메이저스처럼, 얼굴과 캐릭터가 함께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여전사 둘, 서로 다른 힘의 방식
비슷한 시기 안방극장에는 또 다른 여성 주인공이 있었습니다. 예민한 청각으로 위기를 풀어가던 소머즈였습니다.
한쪽은 팔찌와 올가미, 다른 쪽은 남들보다 밝은 귀. 힘을 쓰는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둘 다 남자 영웅들 틈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확실히 만들어냈습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둘 중 누가 더 멋있는지를 두고 은근한 취향 차이가 갈리기도 했습니다.
Wonder Woman TV Movie 주제가 원곡 — Warner Bros. Classics 공식 채널
여자 영웅이 드물던 안방극장에서
그 무렵 안방극장 속 영웅은 대부분 남자였습니다. 맥가이버도, 전격 Z작전의 마이클 나이트도, 6백만불의 사나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사이에서 여성이 힘의 중심에 서는 드라마 한 편이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드문 일이었습니다. 큰 담론으로 이어지기보다, “여자도 저렇게 멋있을 수 있구나” 정도의 감상으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비슷한 시기 미국에서도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화두로 떠오르던 때였습니다. 안방극장 한 켠에서는 그런 흐름과 무관하게, 그저 팔찌 찬 영웅 하나가 조용히 자기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거창한 구호 없이도, 매주 화면 속에서 위기를 스스로 풀어내는 여성 주인공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지금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들
동양방송, 외화 더빙판, 진미령이라는 이름 모두 지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때는 해외 드라마를 원어 그대로 접할 방법이 거의 없어, 성우 목소리로 더빙된 화면이 전부였습니다.
수입한 방송사가 주제가까지 한국어로 새로 만들어 붙이는 것도 흔한 방식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자막이나 원어 음성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기에, 더빙판 목소리와 노래가 곧 그 캐릭터의 전부로 자리 잡았습니다.
외화라는 말 자체도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습니다. 그때는 해외에서 들여온 드라마를 통틀어 이렇게 불렀고, 신문 방송 편성표에도 흔히 등장하던 표현이었습니다.
정말 어른들도 함께 봤을까
어린이 프로그램처럼 여겨지기 쉽지만, 저녁 시간대 온 가족이 함께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텔레비전 한 대를 온 식구가 나눠 보던 그 시절 사정과도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채널을 고르는 사람은 대개 아버지였지만, 이 드라마가 나오는 시간만큼은 별다른 불만 없이 함께 시청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전해집니다.
다음 날 학교에서도 이 이야기가 화제였습니다. 어제 방송에서 누가 위기에 처했는지, 어떻게 풀려났는지를 두고 쉬는 시간 내내 수다가 이어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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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이 남긴 것
제자리에서 도는 동작 하나, 팔목에 채운 고무줄 팔찌, 그리고 진미령이 부르던 그 주제가까지. 원더우먼은 화려한 특수효과 없이도 여자아이들에게 또렷한 영웅 하나를 남겼습니다.
지금 다시 그 회전 동작을 따라 해본다면 그때만큼 자연스럽게 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순간 느꼈던 두근거림만큼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을 겁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08-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