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구 유리 진열장 앞에 쪼그려 앉아 백원짜리 동전을 세고 또 세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진열장 안에는 로봇 모양 상자들이 나란히 서 있었고, 마음에 둔 상자 하나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얼마인지 묻는 게 그날의 가장 중요한 용무였습니다.
프라모델은 1969년 서울 돈암동의 한 살림집 마당에서 시작됐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플라스틱 모형을 취미로 만들던 김순환 씨가 교편을 내려놓고 아카데미과학을 차린 게 그 출발점이었고, 이후 이 회사가 찍어낸 로봇 프라모델이 전국 문방구 진열대를 채우며 한 세대의 방과 후를 바꿔놓았습니다.
반다이를 베낀 로봇, 그래도 되던 시절
그 무렵 진열대에 서 있던 로봇 상자 상당수는 일본 반다이가 만든 건담의 생김새를 그대로 옮긴 제품이었습니다. 아카데미과학은 이 카피판에 ‘칸담’이라는 이름을 붙여 팔았습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노골적인 저작권 침해지만, 그 무렵 한국은 아직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기 전이라 저작권을 따지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전국에 100여 개 업체가 프라모델을 찍어냈고, 대부분이 일본 제품을 그대로 본뜨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아카데미과학만 직접 금형을 설계해 자체 제품을 냈고, 그 기술력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국내 프라모델 회사가 됐습니다.
탱크나 전투기, 군함 프라모델도 진열대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손이 먼저 가는 쪽은 늘 로봇이었습니다. 브라운관 속에서 마징가나 태권브이 같은 로봇들이 한창 활약하던 시절이라, 화면 속 로봇을 손에 쥐고 싶어하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진열대로 옮겨갔습니다.
그 시기 정확한 매출 규모를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전국 어느 동네를 가도 문방구 진열장 한 칸쯤은 로봇 상자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질 만큼, 규모 자체는 작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40년째 금형을 만지는 손
로봇 하나가 상자에 담기기까지는 먼저 금형이라는 쇳덩어리가 있어야 했습니다. 아카데미과학의 금형 부서에는 1981년에 입사해 지금도 현역인 장인이 있고, 회사에는 창립 이래 찍어낸 5,000여 개 제품의 금형판이 그대로 보관돼 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 경기도 의정부에 자리한 이 회사는 국내 프라모델 업체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았습니다. 그 무렵 문방구 진열장을 채웠던 손끝의 기술이, 이름을 바꾸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추억 소환! 마지막 남은 프라모델 제작사, 아카데미과학 이야기 (소비더머니)
진열대 앞에서 벌어지던 눈치싸움
용돈을 받는 날이면 문방구 진열대 앞은 아이들로 북적였습니다. 누가 먼저 새로 들어온 로봇 상자를 집어 드는지가 그날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칸담 한 개 값은 아이 손에 쥔 용돈으로는 늘 빠듯했습니다. 며칠씩 모은 동전을 세어보고도 모자라, 다음 용돈날까지 진열장 안 그 상자를 매일 들여다보며 기다리는 일도 흔했습니다. 용돈을 모아 문방구에서 로봇 프라모델을 사 모으던 기억은 지금 30~40대에게도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다고 전해집니다.
형이나 언니가 먼저 산 로봇을 잠깐 빌려다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움을 살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새 상품이 들어오는 날짜는 정식으로 공지되는 법이 없었는데도, 어찌 된 일인지 아이들 사이에서는 먼저 소문으로 퍼졌습니다.
설명서 한 장에 의지해 조립하던 밤
상자를 열면 얇은 설명서 한 장과 회색 플라스틱 런너가 나왔습니다. 글자보다 그림이 많은 그 종이 한 장이 조립의 전부였습니다.
니퍼 같은 전용 공구는 귀했습니다. 손으로 뜯거나 집에 있던 가위를 몰래 가져다 쓰다 보면, 로봇 발끝처럼 작은 부품이 방바닥 어딘가로 튕겨 나가 사라지는 일이 잦았습니다. 반나절을 뒤져도 못 찾으면 그 부품 없이 로봇을 완성해야 했습니다.
본드 냄새가 방 안에 옅게 퍼지는 동안 손끝은 접착제로 번들거렸습니다. 설명서 그림만 보고 순서를 짐작하다 팔 한쪽을 거꾸로 붙이는 실수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다시 떼어내려다 부품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그날 조립은 거기서 멈췄습니다.
접착제가 마를 때까지 손으로 부품을 붙든 채 숫자를 세던 시간도 있었습니다. 다 마르기 전에 손을 떼면 이음새가 벌어져 로봇 다리가 비뚤어졌고, 그렇게 완성된 로봇은 세워둘 때마다 한쪽으로 살짝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다시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숙제를 미뤄두고 밤늦도록 로봇 하나에 매달리다 부모님께 불려가는 일도 흔했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서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어젯밤 완성한 로봇 이야기를 하느라 쉬는 시간이 짧게 느껴졌습니다.
35년 전 아카데미과학 구판 프라모델 조립 영상 — 옛 런너와 설명서 그대로
색을 입히면 비로소 완성되던 로봇
조립만으로 끝나는 아이는 드물었습니다. 회색 플라스틱 그대로는 어딘가 밋밋했고, 집에 있던 수채화 물감이나 누나의 매니큐어까지 동원해 로봇에 색을 입히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붓끝이 삐져나가 팔 한쪽이 온통 빨갛게 물드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그래도 그 서투른 도색이야말로 세상에 하나뿐인 내 로봇을 만드는 마지막 과정이었습니다.
같은 상자에서 나온 로봇인데도 도색을 마치고 나면 저마다 다른 얼굴이 됐습니다. 잘 칠한 친구 로봇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다, 다음 로봇은 꼭 이렇게 칠하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동네 미술학원에 다니던 친구가 어쩌다 아크릴 물감을 가져오면, 그날 하루만큼은 그 친구 주변으로 아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붓 한 자루를 서로 돌려 쓰며 순서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조차, 지금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기다림이었습니다.
책상 위에 세워두던 자랑
완성한 로봇은 책상 한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친구가 놀러 오면 가장 먼저 꺼내 보여주는 물건이 됐고, 학교에 몰래 가져가 자랑하다 선생님께 걸려 압수당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책받침과 공책 표지에도 비슷하게 생긴 로봇 그림이 그려져 있던 시절이라, 진짜 로봇을 손에 쥔 아이는 교실에서 은근한 우쭐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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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이들은 잘 모르는 그 시절 진열대
요즘은 건담이나 로봇 프라모델을 사려면 대형마트 완구 코너나 온라인몰을 이용합니다. 그때는 달랐습니다. 학교 앞 작은 문방구 진열장이 사실상 유일한 창구였고, 주인아저씨가 새 상품을 들여놓는 날이 곧 그 동네 아이들의 대사건이었습니다.
정식 라이선스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던 시절이라, 아이들도 어른들도 그 로봇이 ‘진짜 건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굳이 따지지 않았습니다. 로봇이 멋있고, 값이 감당할 만하면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지금은 프라모델 시장 규모가 수천억 원대로 커졌고, 로봇 프라모델도 해외 직구나 대형 팬시점을 통해 훨씬 다양하게 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상자를 사기 위해 며칠씩 용돈을 세고 진열장 앞을 서성이던 그 기다림만큼은, 지금의 구매 방식으로는 쉽게 재현되지 않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HWuZjcN1QY
아카데미과학 한정판 프라모델 — 옛 로봇 장난감을 다시 만나는 영상
왜 하필 로봇이었을까
탱크나 전투기 프라모델도 꾸준히 팔렸지만, 진열대에서 가장 먼저 동나는 쪽은 늘 로봇이었습니다. 만화영화에서 본 로봇을 실제로 조립해 세워보는 경험은, 그저 장난감을 갖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만족감을 줬습니다.
전투기나 군함은 완성해도 어딘가 어른들의 취미 같은 느낌이었다면, 로봇은 화면 속 주인공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다는 감각에 가까웠습니다. 이 차이가 진열대 앞 줄의 길이를 갈랐습니다.
사촌형 동생끼리 서로 다른 로봇을 하나씩 사 와서는, 누구 로봇이 더 크고 더 멋있는지를 두고 옥신각신하는 풍경도 흔했습니다. 정작 만화 속에서는 편이 갈린 적 없는 로봇들을 마주 세워놓고 싸움을 붙이며 놀던 오후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한국 사회와 맞닿은 구석
1990년대 후반 일본 대중문화가 차츰 개방되고 반다이가 국내에 직접 진출하면서, 카피판 로봇으로 문방구 진열대를 채우던 방식은 서서히 막을 내렸습니다. 지금 아카데미과학은 오히려 반다이코리아의 건담 유통을 대행하는 회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세계와의 문이 반쯤 닫혀 있던 시절에만 가능했던 진열대 풍경이었습니다. 문이 열리자 풍경도 함께 바뀌었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본드 냄새가 옅게 남은 손끝으로 완성한 로봇을 책상 위에 세워두고 한참을 바라보던 밤을 떠올리면, 팔 한쪽에 삐져나온 빨간 물감 자국까지도 그리워진다. 창밖은 이미 어두웠고, 방 안 백열등 아래서 로봇은 실제보다 훨씬 커 보였다. 다음 날 학교에 가져갈 생각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문방구 진열대가 남긴 것
칸담이든 정식 라이선스 제품이든, 그 로봇들은 단순한 장난감 이상이었습니다. 며칠씩 모은 용돈과 서툰 도색, 잃어버린 부품 하나까지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물건이었습니다.
다락방이나 창고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다리 한쪽이 부러진 로봇을 발견하고, 그 시절 방바닥에 흩어져 있던 부품들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인터넷 중고 거래에서는 그때 그 상자 그대로의 미개봉 프라모델이 꽤 높은 값에 거래된다고도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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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이들은 완제품 피규어를 사거나 온라인 주문 몇 번이면 로봇을 손에 넣습니다. 설명서 한 장을 붙들고 씨름하던 그 밤의 기억은, 이제 다른 방식으로만 되살아납니다.
문방구 유리 진열장 앞에서 동전을 세던 그 손, 방바닥에 흩어진 작은 부품을 찾아 헤매던 그 밤이 여전히 누군가의 기억 한 칸을 차지하고 있을 겁니다. 여러분의 책상 위에는 어떤 로봇이 서 있었나요.
최종 업데이트: 2026-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