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실 구석 자리, 두 대의 재믹스가 나란히 놓여 있고 그 앞에 아이 넷이 붙어 앉습니다. 화면 안에서는 동글동글한 로봇이 폭탄을 내려놓고 냅다 도망칩니다. 폭발이 벽돌을 부수는 순간, 옆자리 친구가 그 틈으로 뛰어들었다가 자기가 놓은 폭탄에 휘말려 나가떨어집니다. 허드슨소프트가 1983년 내놓은 이 게임은 이후 오락실 기판, 가정용 게임기, 컴퓨터실 겸용 게임기를 두루 오가며 한국 아이들 사이에 폭탄을 심어놓은 게임으로 남았습니다.
폭탄남에서 봄버맨으로
봄버맨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습니다. 1983년 7월 일본 PC-8801용으로 나온 “폭탄남”이 원형이었고, 같은 해 MSX로 옮겨지면서 지금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널리 알려진 쪽은 그 뒤입니다. 1985년 12월 일본 패미컴판이 나오면서 미로를 돌며 폭탄으로 길을 뚫고 몬스터를 없애는 50스테이지 구성, 화력·폭탄 개수·부츠 같은 파워업 아이템이 정리됐습니다. 지금 이 시리즈가 가진 뼈대 대부분이 여기서 완성됐습니다.
재믹스 화면 속 ‘폭탄인간’
한국에 이 게임이 들어온 경로는 정식 수입이 아니었습니다. 대우전자 재믹스나 패미컴 복제기용 합팩 카트리지 안에, 봄버맨은 “폭탄인간”이라는 이름을 달고 슬쩍 끼어 있었습니다.
재믹스는 원래 MSX 규격의 교육용 컴퓨터이기도 했습니다. 대우가 만든 교육용 납품 모델이 학교와 컴퓨터학원에 깔렸던 걸 생각하면, 방과 후 컴퓨터실에 앉은 아이들이 베이직 수업 대신 몰래 게임 카트리지를 꽂아 넣었다 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합팩 하나에 게임 수십 개가 들어 있던 시절이라, “폭탄인간”은 다른 이름 모를 게임들 사이에 묻혀 있다가 우연히 발견되는 식으로 퍼졌습니다. 표지에 큼직하게 적힌 제목이 아니라, 커서를 넘기다 발견한 폭탄 그림 하나로 아이들 사이에 입소문이 돌았습니다.
오락실판 폭탄, 그리고 국산 아류작
봄버맨은 원래 오락실 출신 게임이 아니었습니다. 아이렘이 허드슨으로부터 라이선스를 받아 1991년에야 아케이드판을 냈고, 해외에는 “다이나 블래스터”, 북미에는 “아토믹 펑크”라는 이름으로 퍼졌습니다.
이 아케이드판의 핵심은 최대 4명이 동시에 붙는 배틀 모드였습니다. 협동으로 스테이지를 깨는 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폭탄을 놓는 방식이라, 한 판 두 판 지날수록 옆에 앉은 친구가 순식간에 적으로 바뀌었습니다.
Dyna Blaster(봄버맨 아케이드판, 아이렘, 1991) 4인 대전 실제 플레이 영상
이 게임의 인기를 지켜본 국내 업체도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1992년 FM웍스라는 회사가 봄버맨 아케이드판 블록 구성을 참고해 “파이어볼”이라는 이름의 4인용 아류작을 오락실에 내놓았습니다. 당시 국산 이미테이션 게임 중에서는 드물게 만화풍 그림체를 쓴 게임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품이든 아류작이든, 오락실 한쪽에서 폭탄 게임 화면 앞에 서너 명이 붙어 있는 풍경만큼은 똑같았습니다.
정식 기판을 들여오려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에, 규모가 작은 오락실일수록 이런 국산 아류작이나 복제 기판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원조인지보다 그날 그 오락실에 어떤 폭탄 게임이 놓여 있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왜 하필 넷이 모이면 이 게임이었을까
동네 오락실 구석, 폭탄 게임 기계 앞에는 유독 자리가 넉넉했습니다. 조이스틱 하나짜리 대전격투 게임처럼 두 명만 붙는 게 아니라 네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서를 기다리는 줄이 아니라 처음부터 여러 명이 한 화면에 들어가는 구조라, 승부보다 먼저 자리를 채우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동전 하나로 넷이 한꺼번에 즐긴다는 점이 다른 오락실 게임과 달랐습니다.
협동 게임이라면 실력 차가 나도 서로 도우며 끝까지 갈 수 있지만, 이 게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력이 부족한 아이도 운 좋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면 이길 수 있었고, 그 우연성이 승부를 더 팽팽하게 만들었습니다.
순서를 기다리며 배운 규칙
봄버맨을 처음 접한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운 건 자기가 놓은 폭탄에 자기가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좁은 통로에서 폭탄을 놓고 도망치다 폭발 범위를 잘못 계산해 스스로 사라지는 일이 흔했습니다.
화력 아이템을 먹으면 폭발 범위가 넓어졌고, 폭탄 개수 아이템을 먹으면 동시에 여러 개를 깔 수 있었습니다. 부츠를 먹은 아이는 발이 빨라져 도망은 잘 쳤지만, 그만큼 자기 폭탄 앞으로 뛰어드는 사고도 잦았습니다.
4인 대전에서는 눈치 싸움이 더 컸습니다. 누가 어떤 아이템을 먹었는지, 어느 구석에 몰렸는지를 곁눈질로 살피며 다음 폭탄 자리를 골라야 했습니다.
Bomberman(1985년 일본 패미컴판) 원작 스테이지 진행 영상
동시에 이겼다고 우기던 순간들
대전 모드는 룰이 단순한 만큼 다툼도 잦았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폭탄을 놓아 거의 동시에 터지는 순간이 나오면, 누가 먼저 죽었는지를 두고 한참을 우겼습니다.
심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서, 결국 다음 판을 새로 돌려 승부를 가리는 쪽으로 정리되곤 했습니다. 지는 쪽이 억울하다고 소리를 높이면, 구경하던 다른 아이들이 웃으며 그 다음 판 순서를 정했습니다.
협동해서 스테이지를 깨는 게임과 달리, 이 게임 앞에서는 어제까지 짝꿍이던 친구도 순식간에 상대편이 됐습니다. 그 낙차가 오히려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기고 나서도 뒤끝이 길지 않았다는 점은 신기합니다. 방금까지 서로 폭탄을 던지며 몰아붙이던 아이들이 다음 판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나란히 앉았습니다. 승부는 그 순간뿐이고, 자리는 계속 같이 지켰습니다.
100원짜리 동전과 순서표
오락실에서든 컴퓨터실에서든, 넷이 붙는 자리를 채우는 일이 늘 쉽지는 않았습니다. 세 명은 모였는데 한 명이 안 오면 나머지 자리는 그냥 비워두거나, 마침 지나가던 다른 아이를 붙잡아 채우기도 했습니다.
학교 끝나고 100원짜리 동전 하나를 손에 쥐고 뛰어가던 오후가 있었습니다. 그 동전 한 닢으로 얼마나 오래 버티느냐보다, 몇 명이서 같이 앉느냐가 그날의 재미를 결정했습니다.
교육용 컴퓨터 정책과 함께 저물다
재믹스 같은 8비트 MSX 기기가 컴퓨터실 한쪽을 차지하던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1989년 정부의 교육용 컴퓨터 보급 사업에서 8비트 대신 16비트 PC가 선정되면서, 학교와 컴퓨터학원의 기기들도 하나둘 자리를 넘겨줘야 했습니다.
그 무렵을 지나며 재믹스는 급격히 낡은 기계 취급을 받았습니다. 화면 속 폭탄인간을 처음 만났던 그 기계가 어느새 뒷방 신세가 되는 모습을, 당사자인 아이들도 어렴풋이 지켜봤습니다.
정말 이름부터 다른 게임이었을까
“폭탄인간”과 “봄버맨”이 같은 게임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던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정식 유통망을 거치지 않은 복제 카트리지라 표지 디자인도, 제목 표기도 원작과 딴판이었습니다.
나중에 잡지나 친구를 통해 원래 이름이 봄버맨이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어릴 적 그 게임과 처음 만난 순간이 다시 떠오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은 늦게 맞춰졌어도, 폭탄을 놓고 도망치던 손끝의 기억은 그대로였습니다.
합법적인 라이선스 게임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게임 이름표가 아니라 화면 속 규칙을 얼마나 잘 이해했는지였습니다.
지금 세대를 위한 짧은 설명
재믹스는 지금으로 치면 콘솔과 컴퓨터를 겸한 기기였습니다. 카트리지를 꽂으면 게임기가 됐고, 키보드를 연결하면 베이직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학습용 컴퓨터로도 쓰였습니다. 합팩 카트리지 하나에 정식 라이선스 없이 복제된 게임 수십 개가 들어 있던 것도 그 시절 흔한 방식이었습니다.
오락실 아케이드판과 가정용 게임기판은 그래픽도 조작감도 달랐지만, 폭탄을 놓고 도망친다는 규칙만큼은 어느 기기에서든 똑같았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 하나로 온라인 대전을 즐기지만, 그때는 같은 화면 앞에 몸을 붙이고 앉아야 대전이 성립했습니다. 팔꿈치가 부딪히고 어깨너머로 서로의 화면이 훤히 보이는 채로 치르는 승부였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재믹스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승패보다 먼저 웃음소리가 생각난다. 방금까지 같은 편처럼 굴던 친구가 좁은 통로 끝에서 폭탄을 놓고 시치미를 뗐다. 화면 속 로봇이 펑 터지며 사라지고,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 하나가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조이스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봄버맨이 남긴 것
패미컴 화면 속 작은 로봇 하나가 재믹스 카트리지를 타고, 오락실 기판을 타고, 국산 아류작까지 만들어내며 여러 갈래로 퍼졌습니다. 협동이 아니라 대결이라는 점이 오히려 이 게임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 이유였습니다.
이 시리즈는 이후로도 슈퍼패미컴판을 다섯 편이나 내놓고 새턴, N64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국내 닌텐도 스위치 출시 타이틀로 슈퍼 봄버맨 R이 한국어 자막과 함께 나왔고, 초기작들을 묶은 슈퍼 봄버맨 컬렉션도 한국어판으로 다시 나올 예정입니다.
원조 폭탄인간을 재믹스 화면으로 처음 만났던 사람들에게는, 그 소식이 반가우면서도 어딘가 낯설게 들리는 모양입니다.
이름도, 기계도, 화면 해상도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도 좁은 통로에서 폭탄을 놓고 도망치다 친구와 눈이 마주치던 그 순간의 긴장감만큼은, 지금 새로 나오는 시리즈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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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9-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