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스키와 허치, 그 빨간 그란 토리노를 기억하시나요

골목 어귀에 세워둔 자전거를 형사차라 우기며,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친구를 겨누던 늦은 오후가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안에서는 빨간 줄무늬가 그어진 자동차 한 대가 방금 막 사이렌도 없이 골목을 빠져나갔습니다. 스타스키와 허치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 ABC에서 방영된 형사 드라마로, 국내에서는 KBS 2TV를 통해 더빙 방영되며 인기를 끌었습니다.

더빙판이 안방에 들어온 순간

양지운과 배한성. 이 두 이름이 한 짝으로 붙어 다니게 된 것도 이 드라마 때문이었습니다. 성우 양지운이 스타스키를, 배한성이 허치를 맡아 더빙했고, 둘의 호흡이 워낙 잘 맞아 이후로도 오랫동안 ‘찰떡궁합 콤비’로 불렸습니다.

외화 시리즈가 저녁 편성표 한 줄을 차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릴 이유도 없었습니다. 정해진 요일, 정해진 시간에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 앉는 것 자체가 하나의 규칙이었습니다.

더빙이라는 방식도 지금과는 무게가 달랐습니다. 원어 자막 대신 한국어 목소리가 배우의 입을 대신 채우던 시절, 성우의 목소리가 곧 그 캐릭터의 얼굴이 되곤 했습니다. 데이비드 스타스키와 켄 허치슨이라는 이름보다 양지운·배한성의 목소리가 먼저 떠오른다는 사람이 많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제3의 주인공, 빨간 줄무늬 토리노

포드 그란 토리노. 빨간 차체에 흰색 화살표 무늬가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이 자동차는 드라마 안에서 단순한 소품이 아니었습니다. 제작진이 처음 구상한 건 초록색 쉐보레 카마로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포드와의 협찬 계약 때문에 결국 이 빨간 토리노로 바뀌었다고 전해집니다.

결과적으로는 그 우연이 드라마의 얼굴을 만들었습니다. 두 형사의 이름보다 이 자동차의 줄무늬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그란 토리노는 스타스키와 허치의 ‘제3의 주인공’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화면 속에서 그 차가 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방 안의 공기도 같이 조여드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사이렌을 울리지 않고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동차라는 게, 그때는 신기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 인기에 힘입어 실제로 같은 색·같은 줄무늬를 입힌 ‘스타스키 앤 허치 스페셜 에디션’ 토리노가 한정 생산되기도 했습니다. 자동차 한 대가 드라마 밖으로 걸어 나온 셈인데, 국내 시청자에게는 그저 화면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꿈의 차였습니다.

스타스키와 허치(1975~1979) 오프닝 타이틀 — 빨간 그란 토리노가 등장하는 장면

과격한 형사와 신중한 형사

스타스키는 작은 사건도 큰일처럼 밀어붙이는 성격이었고, 허치는 매사에 몸을 사리며 신중하게 움직이는 쪽이었습니다. 씨네21이 훗날 이 작품을 다루며 짚었듯, 두 사람은 통쾌한 액션이나 정교한 사건 해결보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데 더 공을 들이는 콤비였습니다.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물이라기보다, 두 남자의 말싸움을 구경하는 재미가 더 큰 드라마였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그 티격태격하는 리듬이 더빙 성우들의 호흡과 맞물리면서, 원작보다 더 정겨운 캐릭터로 남았습니다.

비슷한 시기 방영된 다른 형사물들이 대개 한 사람의 영웅담으로 흘러갔다면, 이 드라마는 두 사람이 서로 잔소리하고 투덜대는 구도 자체가 웃음 포인트였습니다. 그 어긋남이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습니다.

골목에서 그란 토리노가 되던 아이들

그 시절을 떠올리면, 세발자전거 손잡이에 색종이를 감아 빨간 줄무늬 흉내를 내던 손이 먼저 생각납니다. 진짜 자동차를 가질 수 없었으니, 자전거든 리어카든 손에 잡히는 대로 무늬를 그려 넣는 게 최선이었습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 날 학교 운동장에서는 누가 스타스키고 누가 허치인지를 놓고 실랑이가 붙곤 했습니다. 다들 형사 역할을 하고 싶어 했지만, 정작 인기 있는 배역은 사람이 아니라 그 빨간 자동차였습니다.

장난감 가게 진열대에 그란 토리노를 닮은 미니카가 놓이면 한참을 서서 구경만 하다 돌아서는 일도 흔했습니다. 사는 것보다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물건이 그때는 많았습니다.

운이 좋아 빨간 미니카 하나를 손에 넣은 친구가 있으면, 그 주변으로 아이들이 둘러앉아 순서를 정해 굴려보곤 했습니다. 정작 그 차가 무슨 사건을 해결했는지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색깔만큼은 또렷하게 남았습니다.

공터에 자전거 두세 대를 세워두고 편을 갈라 형사 놀이를 하던 저녁도 있었습니다. 누구는 스타스키, 누구는 허치를 맡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다들 페달을 밟으며 빨간 자전거의 주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동네에 그란 토리노를 흉내 낸 자전거가 한 대라도 있으면, 그 집 마당은 금세 아이들의 집합소가 됐습니다. 줄무늬 하나가 그렇게 큰 힘을 가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 자전거의 주인이 누구였는지는 잊혀도, 마당에 모여 앉았던 그날의 온기는 오래 남습니다.

문방구 앞에 놓인 장난감 권총

드라마 인기를 타고 문방구 진열대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두 형사가 늘 품고 다니던 것을 흉내 낸 장난감 권총이 등장했고, 그 앞에서 용돈을 만지작거리던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는 회고가 전해집니다.

딱총 화약을 넣고 방아쇠를 당기면 매캐한 냄새와 함께 딱 소리가 났습니다. 진짜 사건과는 아무 상관없는 놀이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들 화면 속 형사가 된 기분을 냈습니다.

총 하나를 가진 아이 주변으로 나머지가 몰려들어 대신 쏘게 해달라고 조르는 풍경도 흔했습니다. 순서를 정하고, 총알처럼 소리만 내는 놀이인데도 그렇게 진지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작 손에 넣지 못한 아이가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나뭇가지나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대신했던 기억이 더 흔하게 남아 있습니다.

흑백에서 컬러로 넘어가던 무렵

이 드라마가 안방에 들어온 1981년은, 한국에 컬러텔레비전 방송이 막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흑백으로 보던 화면에 색이 입혀지면서, 그란 토리노의 빨간색도 비로소 화면 그대로의 빛깔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방송 방식과 새로운 외화가 거의 같은 시기에 안방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변화가 많던 시절이었지만 텔레비전 앞에 앉은 아이들에게는 그저 다음 화가 궁금한 저녁일 뿐이었습니다.

흑백 화면에 익숙하던 눈으로 처음 컬러 방송을 봤을 때, 사람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게 그 빨간 줄무늬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색이 붙는다는 것 자체가 낯선 사건이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지금 세대가 잘 모르는 이야기 하나

‘외화 시리즈’라는 말 자체가 지금은 낯설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도, OTT도 없던 시절에는 해외 드라마를 보는 유일한 통로가 방송사가 편성해 더빙까지 입힌 이 ‘외화 시리즈’ 코너였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채널 앞에 앉아야만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시절 더빙은 지금처럼 자막을 곁들이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한국어로 새로 연기하는 작업에 가까웠습니다. 배우의 표정에 성우의 목소리를 입히는 이 과정이 워낙 정교해서, 원작 배우의 얼굴보다 성우의 목소리로 캐릭터를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본방송을 놓치면 다시 볼 방법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재방송 편성표를 뒤지거나, 다음 시즌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마저도 못 챙겨 본 날에는 학교에서 친구 입을 통해 줄거리를 전해 듣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어떤 장면을 봤는지가 그날의 화젯거리가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왜 하필 이 콤비였을까

비슷한 시기 방영된 형사물이 여럿 있었지만, 스타스키와 허치만큼 두 사람의 성격 차이를 코미디로 풀어낸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한쪽은 저돌적이고 한쪽은 소심한 이 대비가, 국내 시청자에게도 낯설지 않은 조합으로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성우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더해지면서, 원작이 가진 코믹한 케미가 한국어로도 고스란히 살아났습니다. 두 형사가 나란히 화면에 잡히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났다는 사람이 많았던 이유입니다.

채널이라고 해봐야 KBS1, KBS2, MBC 셋이 전부이던 시절, 저녁 편성표를 고르는 폭 자체가 넓지 않았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매주 같은 콤비를 만난다는 건 지금의 ‘정주행’과는 다른, 기다림이 포함된 즐거움이었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저녁상을 물리기도 전에 텔레비전 앞자리를 맡아두던 손이 있었습니다. 화면 속 빨간 자동차가 골목을 빠져나가는 순간, 방 안의 누구도 젓가락을 들지 않았습니다. 창밖 골목에는 진짜 그란 토리노 대신 색종이를 감은 자전거 한 대가 세워져 있었고, 그것으로도 충분한 저녁이었습니다.

빨간 줄무늬가 남긴 것

스타스키와 허치가 남긴 건 정교한 사건도, 화려한 액션도 아니었습니다. 성우 두 사람의 목소리, 티격태격하던 콤비의 리듬, 그리고 골목을 누비던 빨간 줄무늬 자동차 한 대였습니다.

지금도 그 무렵을 함께 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줄거리보다 그 자동차 색깔부터 먼저 튀어나옵니다. 사건이 어떻게 풀렸는지는 가물가물해도, 빨간 차체와 흰 줄무늬만큼은 어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세대를 넘어 이 콤비의 자동차는 2004년 영화로도 다시 등장했는데, 원작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빨간 줄무늬 하나만으로 반가움을 느꼈을 법합니다.

2004년 영화 «스타스키와 허치» 공식 예고편(Warner Archive) — 빨간 그란 토리노가 세대를 넘어 다시 등장하는 모습

여러분은 그 무렵 텔레비전 앞에서 어떤 장면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형사 두 사람의 이름이든, 자동차의 줄무늬든, 저녁 밥상을 미뤄두고 앉아 있던 그 자리든 좋습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1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