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방 문을 밀고 들어가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너덜너덜해진 표지였습니다. 빨간 머리 소년이 공을 든 채 뛰어오르는 그 표지 한 권을 서로 먼저 보겠다고 대여 카드에 이름을 적어두고 순서를 기다리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골목 어귀 농구 골대 앞에도 어김없이 그 만화 얘기가 오갔습니다.
제목은 슬램덩크. 일본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슈에이샤 소년점프에 연재한 작품으로, 단행본 31권에 일본에서만 1억 7천만 부 넘게 팔렸습니다. 국내에는 대원씨아이가 발행하던 만화잡지 소년챔프에 연재됐는데, 이때 배경도 한국으로, 등장인물 이름도 전부 한국식으로 바뀌어 실렸습니다.
이 만화가 왜 그렇게 인기였는지 한 문장으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농구를 전혀 모르던 아이도 이 만화를 읽고 나면 학교 체육 시간에 농구공부터 찾았고, 이미 농구를 좋아하던 아이는 만화 속 경기를 보며 자기 실력을 가늠해보곤 했습니다.
동전 몇 개로 하루를 채우던 만화방
그 시절 만화방은 화려한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좁은 통로 양옆으로 빼곡히 꽂힌 만화책, 낡은 방석이 깔린 평상, 그리고 어디선가 늘 끓고 있던 라면 냄새가 그 공간의 전부였습니다. 한 권 대여료는 동전 몇 개 수준이었지만, 용돈이 넉넉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그마저도 아껴 써야 할 돈이었습니다.
신간이 들어오는 날이면 이야기가 달랐습니다. 주인아저씨가 새로 들어온 권수를 카운터에 올려두기 무섭게 대여 카드에 이름을 적어두려는 아이들이 몰렸습니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권을 뒤적이며 시간을 때우다가도, 자기 차례가 다가오면 괜히 카운터 쪽을 흘끔거리게 됐습니다.
“왼손은 거들뿐” — 교실을 채운 대사 한 줄
이 만화가 남긴 건 캐릭터 이름만이 아니었습니다. 슛을 쏘는 순간 강백호가 되뇌던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대사는, 만화를 안 본 아이들까지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널리 퍼졌습니다. 체육 시간 농구공을 던지면서 괜히 이 대사를 흉내 내던 아이들이 반마다 한둘씩 있었습니다.
연습장 표지나 공책 뒷장에 이 대사를 옮겨 적어두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딱히 농구를 잘하지 못해도, 슛을 쏘는 시늉을 하며 저 말을 중얼거리는 것만으로 뭔가 있어 보이는 기분이었습니다.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강백호가 된 사연
일본 원작의 주인공 사쿠라기 하나미치는 국내판에서 강백호가 됐습니다. 루카와 카에데는 서태웅으로, 아카기 다케노리는 채치수로, 미야기 료타는 송태섭으로 바뀌었습니다. 지명도 일본식 지역명 대신 한국식 학교와 동네 이름으로 손질됐습니다.
당시엔 이런 로컬라이징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원작이라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독자도 많았고, 오히려 강백호나 서태웅 같은 이름이 원래부터 그 캐릭터의 이름인 줄 알고 자란 세대도 적지 않았습니다. 훗날 원작 이름을 알게 됐을 때 묘한 배신감 반, 반가움 반을 느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루에 열 편씩 녹음한 전설의 비디오 더빙
애니메이션은 국내에 조금 다른 경로로 먼저 들어왔습니다. 1994년, 소년챔프를 발행하던 대원동화(현 대원미디어)가 극장 방영 대신 비디오테이프로 먼저 출시한 겁니다. 1부 20화, 2부 20화로 나뉘어 대여점에 깔렸고, 만화 연재로 이미 인기를 얻은 덕분에 비디오 대여점 진열대에서도 금세 동났습니다.
다만 제작 과정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비용을 아끼려 하루에 열 편 가까이를 몰아 녹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급하게 만들어진 더빙판이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는 상관없었습니다. 대사 톤이 조금 어색해도, 강백호가 골대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장면만큼은 그대로 짜릿했습니다.
비디오 가게 카운터 앞에 붙은 “슬램덩크 입고” 종이 한 장에 아이들이 몰려들던 풍경도 흔했습니다. 대여 기간을 넘겨 연체료를 물어본 기억이 있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이 작품은 케이블 채널 투니버스와 애니원에서도 여러 차례 다시 방영됐습니다. 한 번 놓친 회차를 재방영 편성표를 뒤져가며 찾아보던 사람들에게는, 그때마다 방송 시간표를 확인하는 일이 하나의 습관처럼 남았습니다.
슬램덩크 SBS판 오프닝, 국내 방영 당시 영상
지상파를 탄 강백호, “너에게로 가는 길”
비디오로 먼저 입소문을 탄 이 작품은 1998년 6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SBS 지상파를 통해 정식 방영됐습니다. 방과 후 텔레비전 앞에 앉는 아이들이 부쩍 늘어난 시기였습니다.
이때 오프닝을 장식한 곡이 가수 박상민이 부른 ‘너에게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코트를 가르며 내달리는 가사가 애니메이션 장면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만화를 안 본 사람도 이 노래만큼은 흥얼거릴 정도였습니다. 대학가 축제 신청곡 1순위로 꼽힐 만큼, 노래 자체가 만화 못지않은 생명력을 얻었습니다.
방영 시간이 다가오면 채널을 미리 맞춰두고 오프닝 전주가 흘러나오길 기다리던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전주 몇 소절만 들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 앞으로 달려가던 모습은, 그 무렵 안방극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습니다.
박상민 – 너에게로 가는 길 (슬램덩크 오프닝, 1998)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서태웅이었다
남학생들이 강백호의 몸놀림과 대사를 흉내 냈다면,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서태웅의 인기가 유독 높았습니다. 말수 적고 무뚝뚝한 성격에, 코트 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화려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기의 이유였습니다.
서로 다른 두 인물을 두고 “누가 더 좋냐”를 놓고 옥신각신하던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만화 속 인물 하나를 두고 반 전체가 편이 갈릴 정도였으니, 그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골목 농구대 앞에 줄이 늘어서던 시절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함께 인기를 끌면서 실제 농구장 풍경도 달라졌습니다. 마침 국내에서도 대학농구 인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시기와 겹치면서, 학교 운동장 한쪽 농구 골대 앞은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로 붐볐습니다.
농구화 유행도 이 무렵 함께 번졌습니다. 강백호가 신은 나이키 에어조던6과 에어조던1, 서태웅이 신은 에어조던5까지, 만화 속 신발 이름을 줄줄 외우는 아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용돈을 모아 정품 대신 비슷하게 생긴 저렴한 농구화라도 한 켤레 사 신으면 그날은 온종일 발끝만 쳐다보게 됐습니다.
1993년 미국 프로농구 선수 패트릭 유잉이 신발 홍보차 내한했을 정도로, 그 시절 농구화 열기는 만화 하나로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뜨거웠습니다. 벽을 딛고 뛰어올라 덩크하는 장면이 나오는 신발 광고까지 나오면서, 골목 농구는 한동안 가장 흔한 방과 후 풍경이 됐습니다.
비슷한 시기 국내 대학농구 리그도 인기를 끌던 참이라, 만화 속 고교 농구와 실제 대학 농구 스타들의 인기가 서로 맞물려 시너지를 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학교 쉬는 시간이면 어제 본 대학 농구 경기와 만화 속 경기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오갔습니다.
정식 코트가 아니어도 상관없었습니다. 골대 하나만 있으면 시멘트 바닥이든 흙바닥이든 상관없이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편을 가르고 순서를 정하는 데만도 한참 시간이 걸리곤 했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만화방 구석 자리에 쪼그려 앉아 다음 권을 기다리던 오후가 떠오른다. 앞사람이 다 읽을 때까지 괜히 표지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마침내 순서가 돌아왔을 때의 그 설렘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돌려 읽던 한 권, 나눠 갖던 대화
매번 대여료를 내기 부담스러운 아이들은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한 권을 빌린 뒤 순서대로 돌려 읽는 방법을 택하기도 했습니다. 먼저 읽은 친구가 다음 내용을 살짝 흘리기라도 하면, 아직 못 읽은 아이는 손으로 귀를 막고 뒷걸음질을 치며 스포일러를 피하려 했습니다.
학교 쉬는 시간마다 어제 읽은 부분을 서로 되짚어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의 놀이였습니다. 정확한 대사를 두고 “그게 아니라 이렇게 말했다”며 티격태격하다가, 다음 쉬는 시간까지 그 논쟁이 이어지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정작 다음 권을 먼저 읽은 사람이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끝까지 입을 다무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습니다.
완전판으로, 그리고 극장판으로 이어진 인기
연재가 끝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이 작품의 인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국내에는 2001년부터 2002년 사이 일반 완전판이, 2007년에는 양장본으로 꾸며진 프리미엄 완전판이 다시 나왔습니다. 전31권이던 단행본은 완전판에서 전24권으로 재편집됐습니다.
만화방에서 낡은 표지를 넘기던 아이들이 어느새 자녀에게 완전판을 사다 안기는 어른이 됐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립니다. 2023년에는 원작자가 직접 각본과 감독을 맡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국내에도 개봉해, 예전 독자들을 다시 극장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어릴 적 만화방에서 보던 얼굴들을 스크린에서 다시 마주한 관객이 적지 않았습니다.
남은 이야기
만화방 대여 카드에 이름을 적고 순서를 기다리던 아이들, 하루 열 편씩 녹음한 어설픈 더빙판, 그리고 박상민의 노래에 맞춰 골목 농구대 앞으로 몰려들던 오후까지. 슬램덩크는 종이 만화 한 편이 학교 앞 풍경 자체를 바꿔놓은 드문 사례였습니다.
용돈을 모아 농구화 한 켤레를 장만해본 기억이 있다면, 그 골목의 열기를 함께 나눈 겁니다. 만화 한 편이 이렇게까지 방과 후 풍경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그때는 아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왼손은 거들뿐”이라는 말을 들으면 저도 모르게 슛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그 골목과 만화방의 기억은 여전히 몸 어딘가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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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