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벌식 세벌식, 한글 타자기 자판은 어쩌다 갈렸을까

늦은 오후 동사무소 민원실, 유리 칸막이 너머로 따다닥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창구 안쪽 여직원의 손끝에서 은빛 지렛대가 튕겨 오르고, 종이 위로 글자가 한 자 한 자 박혔다. 1949년 안과의사 공병우가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처음 세상에 내놓은 뒤로, 1969년 정부가 국무총리 훈령 제81호로 표준 자판을 정하기까지, 한글은 스무 해 가까이 자판 위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 소리를 떠올리면 사무실 특유의 공기가 먼저 생각난다. 종이 넘기는 소리, 전화벨 소리 사이로 타자기 소리만 유독 또렷했다.

골목 안 문방구나 사무기기점 진열창에도 타자기가 놓여 있었다. 까만 몸체에 반짝이는 은색 지렛대, 그 앞을 지나가며 흘끗 들여다보던 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따다닥, 사무실을 채우던 소리

관공서든 은행이든 사무실 한켠에는 타자기 놓인 책상이 따로 있었다. 그 앞에 앉은 사람은 대개 정해져 있었고, 서류가 쌓이면 그 손끝만 바빠졌다.

자판을 두드리는 속도가 빨라지면 소리도 리듬을 탔다. 한 줄을 다 치고 캐리지를 옆으로 밀어 넘기는 철컹 소리가 그 리듬의 마디를 끊어 주었다.

서류 한 장을 잘못 치면 처음부터 다시 앉아야 했다. 수정액이나 수정 테이프가 있었다지만, 깨끗한 공문서 한 장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손끝의 긴장이었다.

회사원 중에는 결재 서류나 계약서를 타자기로 정리해 상사에게 올리는 일이 하루 업무의 큰 몫을 차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장 찍을 자리, 날짜 칸의 간격까지 맞춰 치는 게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퇴근 시간이 다 되어도 서류 마감이 남으면 타자기 앞에 남아야 했다. 사무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소리도 대개 그 따다닥 소리였다.

1980년대 사무실 필수품이었던 타자기 — 옛날티브이 고전영상

리본을 갈아 끼우던 손

타자기 리본이 다 닳으면 글자가 희미해졌다. 잉크가 옅어진 걸 눈치채는 것도, 새 리본으로 바꿔 끼우는 것도 그 자리를 지키던 사람의 몫이었다.

롤러에서 헌 리본을 풀어내고 새 리본을 팽팽하게 감아 끼우는 손놀림에는 요령이 필요했다. 잘못 감으면 잉크가 한쪽으로 몰려 다시 풀어야 했다.

손끝에 검은 잉크가 묻는 건 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흔한 일이었다. 지우려 해도 잘 지워지지 않아 며칠은 손톱 밑이 거무스름했다.

가정에도 타자기를 들여놓은 집이 간혹 있었다. 경방기계공업이 만든 ‘크로바’ 같은 국산 타자기가 사무기기점 진열대에 놓였고, 문학청년이나 자녀 교육에 신경 쓰는 집에서 한 대씩 장만하곤 했다.

일기를 타자기로 쳐 보는 학생도 있었고, 연애편지를 타자기로 정갈하게 정리해 보내는 이도 있었다. 손글씨보다 반듯한 그 활자체가 오히려 정성스러워 보인다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타자학원 앞, 두벌식과 세벌식을 배우던 사람들

학교를 갓 졸업했거나 취업을 앞둔 사람들은 동네 타자학원 문을 두드렸다. 좁은 교실에 타자기가 줄지어 놓이고, 그 앞에 학생들이 나란히 앉아 손가락 위치부터 익혔다.

강사가 부르는 글자를 따라 치는 연습이 몇 주씩 이어졌다. 처음엔 자음과 모음 위치를 외우는 것부터 버거웠다.

공병우식 세벌식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가 하면, 정부가 정한 표준 자판을 가르치는 곳도 있었다. 어느 학원에서 배웠느냐에 따라 손에 익은 자판이 달라졌고, 그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수업이 끝날 무렵이면 강사가 분당 타자 속도를 재 주었다. 옆자리 친구보다 한 글자라도 더 빨리 치고 싶은 마음에 손가락이 절로 바빠지곤 했다.

졸업할 즈음엔 다들 눈을 감고도 자판을 짚을 수 있게 됐다. 그 손끝의 감각은 이후 취업 원서를 쓸 때 요긴한 무기가 됐다.

한글과 컴퓨터가 없던 시절, 1980년대 타자학원 풍경 — 옛날티브이 고전영상

한글은 어떻게 자판 위에 자리 잡았을까

지금 세대는 잘 모르지만, 한글을 자판에 옮기려는 시도는 공병우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1914년 재미교포 이원익이 영문 타자기에 한글 활자를 붙인 모델을 만들었고, 1929년 무렵에는 송기주가 언더우드 휴대용 타자기를 고쳐 네벌식 세로쓰기 타자기를 선보였다.

1949년 3월 조선발명장려회가 연 한글 타자기 현상공모에서 공병우는 세벌식 타자기로 2등을, 김동훈은 다섯벌식 타자기로 3등을 받았다. 자음·모음·받침을 따로 두는 세벌식은 타자 속도가 빨랐고, 다섯벌식은 인쇄 활자에 가까운 글씨체를 앞세웠다.

1952년 해군이 행정 업무에 공병우식 타자기를 들이면서 세벌식은 실용성을 인정받았다. 그 뒤로도 자판 방식은 하나로 모이지 못한 채 여러 갈래로 쓰였다.

정부는 1969년 7월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를 거쳐, 같은 달 28일 국무총리 훈령 제81호로 표준 자판을 확정했다. 이때 정해진 표준은 지금 익숙한 두벌식이 아니라 네벌식이었다. 세벌식과 다섯벌식의 절충안에 가까웠다. 관공서와 학교는 이 훈령에 따라 새 표준 자판을 쓰는 타자기만 들여야 했다.

지금 컴퓨터 자판에서 익숙한 두벌식이 공식 표준 자리를 차지한 건 1980년대 들어서였다. 국가기록원 자료에 따르면 컴퓨터 시대에 맞춰 자판 체계를 다시 손보는 과정에서 두벌식이 새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기계식 타자기의 네벌식과 지금의 두벌식 사이에는 그렇게 한 세대의 시차가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소개하는 근대 한글 타자기

타자기 한 대의 값은 웬만한 봉급으로는 선뜻 손대기 어려운 편이었다. 그래서 개인이 한 대씩 장만하기보다, 관공서나 회사·학교가 여러 대를 들여놓고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쓰는 경우가 흔했다.

타자수가 되고 싶었던 이유

1970년 10월, 공무원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전국 한글 타자 경기대회가 처음 열렸다. 공무원, 은행 직원, 상업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나와 실력을 겨뤘고, 우승자에게는 대통령상과 상금이 주어졌다.

같은 해 정부가 타자능력검정시험규칙을 공포하면서 1급부터 5급까지 등급을 매기는 자격시험도 생겼다. 상업고등학교에서는 이미 1963년부터 타자가 정식 교과목이었다.

타자 자격증 한 장은 곧 취업의 통로였다. 은행이나 관공서에 들어가려는 젊은 여성들에게 타자 실력은 이력서 한 줄을 채우는 요긴한 스펙이었다.

한 사람이 하루 종일 붙잡고 앉아 서류를 쳐 내는 자리였지만, 그 손끝에서 나온 문서 한 장 한 장이 관공서와 회사를 돌아가게 했다.

딸을 상업고등학교에 보내며 “타자라도 배워 두면 밥벌이는 한다”고 말하던 부모도 많았다. 실제로 타자 자격증을 손에 쥔 뒤 은행이나 회사에 자리를 잡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1969년 무렵 전국의 타자기 보급 대수가 4만 대 안팎으로 추산되는데, 그 대수만큼 타자기 앞에 앉은 사람이 있었던 셈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그러나 분명 존재감 있는 숫자였다.

지금 자판과는 무엇이 달랐을까

지금 컴퓨터 자판은 눌러도 힘이 거의 들지 않는다. 하지만 기계식 타자기는 손가락 끝의 힘으로 쇠막대를 밀어 올려 종이를 때리는 구조였다. 한 글자를 치는 데도 제법 힘이 들어갔다.

오타가 나면 지금처럼 지우개 키 한 번으로 없앨 수 없었다. 처음부터 다시 치거나, 수정액을 바르고 마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세벌식이니 네벌식이니 하는 말도 지금 세대에게는 낯설다. 요즘 쓰는 두벌식 자판이 원래부터 유일한 표준이었던 게 아니라, 여러 방식이 자리다툼을 벌인 끝에 남은 결과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980년대 후반 개인용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 전용기가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타자기는 자리를 조금씩 내주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며 고칠 수 있고, 인쇄 전에 오타를 지울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재미있는 건 정부가 표준으로 밀지 않았던 공병우식 세벌식이 지금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타자 속도와 손목 편의성을 이유로 지금도 세벌식 자판을 고집해 쓰는 사람들이 있다고 전해진다. 표준이 바뀌어도 손에 익은 방식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한 모양이다.

경방기계공업(크로바)과 동아정공(마라톤) 같은 국내 타자기 제조사들은 1996년을 끝으로 수동식 타자기 생산을 접었다. 사무실 책상 위 타자기 한 대가 조용히 다른 기계로 바뀌어 가던 시간이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타자학원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던 소리를 떠올리면, 스무 대 남짓한 타자기가 한꺼번에 두드려지던 그 리듬이 먼저 생각난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아직 서툴러 자꾸 다른 자리를 짚었지만, 며칠만 지나면 그 소리도 조금씩 고르게 맞춰져 갔다. 창밖으로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는 동안, 그 불규칙한 리듬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타자기가 남긴 손끝의 습관

공병우의 세벌식에서 시작해 정부의 네벌식 표준을 거쳐 지금의 두벌식에 이르기까지, 한글 타자기는 자판 위에서 꽤 먼 길을 돌아왔다. 그 사이 타자학원과 타자수라는 직업도 함께 생겨났다가 조용히 저물었다.

타자학원 앞에 줄 서던 풍경도, 리본을 갈아 끼우던 손도 이제는 낯선 이야기가 됐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지금도 손가락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원리만큼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사무실 책상 위 까만 타자기 한 대는 사라졌지만, 서류를 완성해 내던 그 손끝의 감각과 성취감은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에도 조금은 남아 있을지 모른다.

여러분은 타자기, 혹은 타자학원에 대해 어떤 기억이 있으신가요. 리본을 갈아 끼우던 손, 분당 타자 속도를 재던 긴장감, 자격증 한 장을 손에 쥐던 순간. 저마다 다른 자판을 두드리며 지나온 기억이겠지만, 그 소리만큼은 신기하게도 다들 비슷하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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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9-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