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저녁 뉴스가 끝나갈 무렵이면 골목 끝 만화가게 앞이 먼저 웅성거렸다. 텔레비전이 있는 집 마당까지 사람들이 밀려들어 마루 밑에 쪼그려 앉고, 담장 너머로 고개만 내민 이웃도 화면 하나를 함께 봤다. 그 화면 한가운데 있던 사람이 김일이었다. 192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난 그는 1963년부터 박치기를 필살기로 극동헤비급·아시아헤비급·WWA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올랐고, 1960~70년대 한국 프로레슬링을 대표하는 얼굴이 됐다.
씨름판을 떠나 현해탄을 건넌 사내
김일은 원래 씨름 선수였다. 1948년부터 1957년까지 씨름판에서 뛰다가, 어느 순간 일본행 배에 몸을 숨겼다. 밀항이 걸려 붙잡혔고, 감옥 안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편지를 쓰는 것뿐이었다.
수신인 자리에는 정확한 주소도 없이 “일본 역도산”이라고만 적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 편지가 실제로 역도산에게 닿았다. 출소한 김일은 곧바로 역도산체육관의 문을 두드렸고, 1957년 정식으로 문하생이 됐다.
씨름판에서 이미 이름을 알렸던 청년이 왜 굳이 밀항선에 몸을 실었을까. 전쟁을 갓 지나온 가난한 시절, 씨름판 하나로는 채워지지 않는 더 큰 무대가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 믿음이 감옥 안에서도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
그 무렵 역도산은 일본에서 이미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런 사람의 제자로 들어간 조선 청년에게, 도쿄의 체육관 바닥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일본 프로레슬링협회(JWA) 링에서 그는 오오키 긴타로라는 이름으로 데뷔했다. 같은 시기 자이언트 바바, 안토니오 이노키와 나란히 역도산 문하의 젊은 삼총사로 불렸는데, 이 셋이 훗날 각자 다른 길에서 프로레슬링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해야지” — 그 한마디가 만든 필살기
역도산은 제자들에게 저마다 다른 무기를 쥐여줬다. 김일에게 건넨 말은 짧았다. 스타가 되려면 남들과 다른 한 방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너는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해보라는 것.
훈련은 듣기만 해도 아찔하다. 이마를 나무에 문지르고 벽에 부딪히기를 반복했고, 이마에서 피가 나는 날도 드물지 않았다고 한다. 정작 훗날 인터뷰에서 역도산 본인은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63년 역도산이 세상을 떠나면서 판이 바뀌었다. 스승을 잃은 자리에서 김일은 스스로 중심이 되어야 했다. 그때부터 박치기를 자기 것으로 다듬기 시작했고, 그 기술 하나로 극동헤비급·올아시아헤비급·WWA 세계헤비급 챔피언 자리를 차례로 따냈다.
가라테춉이 역도산을 상징하는 기술이었다면, 박치기는 온전히 김일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필살기 하나로 정상에 올라섰다.
골목이 텅 비던 밤, 마당까지 들어찬 사람들
1960년대는 텔레비전 한 대가 온 동네 재산이던 시절이다. 프로레슬링 중계가 시작되면 만화가게나 텔레비전이 있는 집으로 동네 사람이 전부 몰려들었고, 마당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더빙된 외화나 미리 찍어둔 드라마와 달리, 이 경기는 그 순간 실제로 벌어지는 생중계였다. 다음 장면을 아무도 미리 알 수 없다는 점이 브라운관 앞의 긴장을 한층 팽팽하게 만들었다.
화면은 작고 흐릿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흑백 화면 속에서 덩치 큰 서양 선수에게 반칙을 당하고 코피를 흘리는 김일을 보며 다들 한마음으로 안타까워했다.
텔레비전이 아예 없는 집은 라디오 앞에 둘러앉았다. 아나운서의 격앙된 목소리만으로 링 위 상황을 가늠해야 했지만, 그 중계를 놓치지 않으려 볼륨을 한껏 키워두는 집이 많았다. 전파상 진열창 앞에 서서 유리 너머로 화면을 훔쳐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세에 몰리던 그가 마지막 순간 박치기 한 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면, 마당 가득한 사람들이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그 함성이 담장을 넘어 옆집까지 퍼져나갔다.
다음 날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며 박치기 흉내를 냈다. 누가 더 세게 부딪히는지 겨루다가 이마에 혹이 나서 선생님께 꾸중을 듣는 일도 흔했다고들 한다. 텔레비전 밖에서도 김일은 아이들의 놀이 속에 그렇게 살아 있었다.
KBS 옛날티비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영상이다. 화질은 거칠지만, 저 흑백 화면 앞에 모여 있던 마당 풍경을 상상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온 나라가 지켜본 승부 — 장충체육관의 함성
1965년 8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극동헤비급선수권 경기가 열렸다. 김일은 호랑이 가운을 걸치고 등장해 일본 선수 요시노 사토를 박치기로 무너뜨리며 초대 극동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이 승리는 TV는 물론 신문에서도 크게 다뤄졌다. 같은 해 11월 27일 밤에는 장충체육관에 7천여 관중이 들어찼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공교롭게도 이 무렵 국회는 한일협정 비준을 두고 극한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청와대에서 김일과 일본 선수의 경기를 시청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만큼, 정치권과 서민 모두가 같은 화면 앞에 앉아 있던 시절이었다.
1967년 4월 29일에는 같은 장충체육관에서 미국의 마크 루니를 꺾고 WWA 세계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반칙과 수모를 견디다 끝내 역전승으로 끝맺는 결말은 이후에도 여러 번 반복됐고, 그때마다 관중은 기다렸다는 듯 환호했다.
이 시절 김일 혼자 링을 지킨 건 아니었다. 장영철, 천규덕 같은 1세대 선수들이 함께 협회를 이끌며 판을 키웠다. 그래도 마지막에 박치기 한 방으로 승부를 뒤집는 장면만큼은 유독 김일의 몫으로 기억됐다.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체육관 앞은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로 아침부터 줄이 늘어섰다. 입장하지 못한 이들은 라디오 중계라도 들으려 근처 다방이나 전파상 앞을 서성였다. 장충체육관 안팎이 한꺼번에 들썩이던 밤이었다.
1994년에는 국민훈장 석류장을, 2000년에는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시상대 위의 훈장보다, 그 훈장을 받게 만든 건 결국 브라운관 앞에 앉아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함성이었다.
KBS 교양 프로그램에서 다시 정리한 김일의 전성기 영상이다. 당시 신문 지면까지 함께 조명한다.
지금은 낯선 프로레슬링, 그때는 왜 다르게 보였을까
요즘 세대에게 프로레슬링은 각본이 있는 쇼에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 실제로 그 시절에도 레슬링은 쇼가 아니냐는 물음이 끊이지 않았고, 김일은 눈물까지 보이며 그렇지 않다고 호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낯선 반응이지만, 그만큼 그에게 이 경기는 진심으로 걸린 승부였다.
승패를 떠나 그 경기가 특별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전쟁을 겪고 가난을 견디던 사람들에게, 덩치 큰 외국 선수에게 얻어맞다가도 끝내 이겨내는 조선 청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위안이었다.
텔레비전 보급률이 아직 낮던 시절, 그 화면 하나를 함께 보기 위해 마당까지 몰려들던 풍경 자체가 이미 특별한 문화였다. 경기 내용보다 그 앞에 모여 앉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이 이야기의 진짜 중심일지도 모른다.
문방구 진열대에는 씨름 선수나 레슬러들의 브로마이드가 종종 걸려 있었고, 아이들 만화잡지에도 프로레슬링을 소재로 한 이야기가 실리곤 했다. 지금처럼 영상을 아무 때나 다시 볼 수 없던 시절이라, 한 번 본 경기 장면을 친구들끼리 몸짓으로 재연하며 며칠씩 우려먹는 게 자연스러운 놀이였다.
김일은 1995년 도쿄돔에서 6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식 은퇴식을 치렀다. 휠체어에 의지한 채 링포스트를 두드리고 돌아서던 그 모습이 마지막 무대였다. 이후 서울 정동의 한 건물 2층에 자신의 이름을 건 체육관을 열었지만,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예전만 못해지면서 오래 이어가지는 못했다.
제자 이왕표가 그 뒤를 이어 링에 올랐다. “박치기왕 김일의 제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한동안 한국 프로레슬링의 명맥을 지킨 이왕표 역시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스승에게서 이어받은 그 이름값만큼은 오래 남았다.
그는 2006년 10월 26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18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헌액됐고, 2020년에는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됐다.
그가 떠난 지 14년 만에 현충원에 안장되던 날을 다룬 KBS 뉴스 영상이다.
다락방 속 한 장면
흑백 화면 속 사내가 이마부터 들이밀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마당 가득한 사람들이 숨을 참던 정적이 먼저 생각난다. 다음 순간 터지는 함성, 그리고 담장 너머까지 번지던 그 소리. 텔레비전 한 대를 사이에 두고 온 동네가 한마음이 되던 그 저녁을, 지금은 각자 손안의 화면만 들여다보는 우리가 다시 만들 수 있을까.
김일이 남긴 것
김일은 씨름판을 떠나 밀항선에 몸을 숨겼고, 감옥에서 쓴 편지 한 장으로 역도산의 제자가 됐다. 조선인이니까 박치기를 해보라는 스승의 한마디를 온몸으로 받아들였고, 그 기술 하나로 세계 챔피언 자리까지 올랐다.
무엇보다 그는 텔레비전 앞으로 온 동네를 불러 모은 사람이었다. 마당까지 발 디딜 틈 없던 저녁, 박치기 한 방에 터지던 함성. 그 풍경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 이름 하나로 그 시절 전체가 떠오를 것이다.
지금도 누군가 곤란한 상황을 정면으로 부딪혀 돌파할 때 “박치기로라도 밀어붙인다”는 말을 쓴다. 그 표현 뒤편에, 반칙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끝내 이마 하나로 승부를 뒤집던 사내의 얼굴이 여전히 겹쳐 있다.
손주에게 저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어르신들도 있다. 텔레비전이 귀했던 시절, 마당까지 사람이 들어차던 그 저녁을 말로 옮기면, 요즘 아이들은 잘 믿지 못하는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그래도 그 표정을 보는 재미로 몇 번이고 같은 이야기를 다시 꺼낸다.
여러분은 김일의 경기를 텔레비전으로 직접 보신 기억이 있으신가요. 그 시절 마당이나 만화가게에서 함께 지켜보던 풍경이 남아 있다면, 댓글로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