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식, 그 허스키한 목소리가 남긴 짧은 전성기

늦은 밤 라디오 다이얼을 돌리다 문득 걸걸하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오면, 손을 멈추고 볼륨을 한 칸 더 올리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김현식이었습니다. 1980년 1집으로 데뷔해 1986년 3집 ‘비처럼 음악처럼’으로 30만 장 넘게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했고, 지병으로 1990년 서른두 살에 세상을 떠난 가수입니다.

다방 스피커 사이로 퍼지던 그 목소리

1980년, 김현식의 이름이 처음 음반 크레딧에 올랐을 때만 해도 그는 여러 신인 가수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집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고, 2집이 나온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방송 출연보다 소극장과 클럽 무대에서 노래하던 시간이 더 길었습니다.

화려한 조명보다 좁은 무대와 낡은 앰프가 더 익숙한 가수였습니다. 얼굴보다 목소리로 먼저 알려진 가수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방송 카메라 앞에 서는 횟수보다 클럽 무대에서 땀 흘리는 밤이 훨씬 많았습니다.

흐름이 바뀐 건 밴드였습니다. 1985년 무렵, 기타의 김종진과 드럼의 전태관, 베이스의 장기호가 김현식 곁에 모였고 한동안 건반으로 유재하도 함께했습니다.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이름의 이 조합은 녹음을 마친 뒤 유재하가 팀을 떠나고 박성식이 새로 합류하는 우여곡절을 거쳤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3집의 타이틀곡이 ‘비처럼 음악처럼’이었습니다. 발표 직후부터 반응이 심상치 않았고, 판매량은 30만 장을 넘겼습니다. 록 밴드 사운드에 얹힌 허스키한 보컬이 그때까지 가요 시장에서 듣기 힘들던 질감이었기 때문입니다.

레코드 가게 진열대 앞에서 그 재킷을 손에 쥐어본 사람이라면 기억을 떠올릴 만합니다. 표지 속 밴드 멤버들의 자유분방한 옷차림은 정장을 갖춰 입은 다른 가수 음반들과 확실히 달랐습니다. 그게 오히려 눈길을 끌었습니다.

목이 쉰 듯한 창법도 처음부터 낯설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발성이 정석으로 여겨지던 가요계에서, 일부러 힘을 뺀 듯한 그 거친 음색은 호불호가 갈렸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친 결 자체가 그의 서명이 됐습니다.

노래방이 없던 시절이라 유행곡은 결국 라디오와 다방을 거쳐 퍼졌습니다. 한 곡이 뜨면 몇 달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던 시대였는데, ‘비처럼 음악처럼’은 그렇게 퍼진 곡치고는 유독 길게 사랑받았습니다.

[관련글: 유재하]

https://www.youtube.com/watch?v=eYiDIeSk3Go
비처럼 음악처럼(1986) — 김현식 3집 타이틀곡

록카페와 심야 라디오, 그 목소리가 되풀이되던 자리

대학가 록카페를 떠올리면, 담배 연기 자욱한 홀 한구석 스피커에서 김현식의 곡이 돌고 또 돌던 풍경이 먼저 생각납니다. 트로트도 발라드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한 록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의 음악이었습니다.

지금은 낯선 이름이지만, 록카페는 스피커가 큰 음악다방에 가까운 공간이었습니다. 손님이 쪽지에 신청곡을 적어 건네면 디제이가 판을 골라 걸어주는 방식이었고, 인기 있는 곡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해서 걸리곤 했습니다.

심야 라디오도 비슷했습니다.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심야 음악 프로그램을 듣던 이들에게 김현식의 노래는 신청곡 단골이었고, 디제이가 곡을 걸어주면 그 목소리 하나로 방 안 공기가 달라지곤 했습니다.

1988년에는 ‘여름밤의 꿈’이 나왔습니다. 여름 저녁 창문을 열어둔 채 라디오를 틀어놓던 풍경과 유독 잘 어울리는 곡으로, 지금도 여름이 오면 다시 찾아 듣는 이들이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xDCgLLZxeQ
여름밤의 꿈(1988) — 김현식

목소리만큼이나 화제가 된 건 그가 무대를 대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화려한 퍼포먼스보다 노래 자체에 몰입하는 창법이었고, 그 진지함이 오히려 팬들을 끌어당겼습니다. 교복을 벗은 지 얼마 안 된 이들 사이에서도, 이미 사회에 나간 또래들 사이에서도 그의 테이프는 서로 빌려 듣는 물건이었습니다.

공테이프에 앨범을 복사해 친구에게 건네던 것도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겉면에 매직펜으로 곡목을 눌러 쓴 그 테이프가, 라디오 방송이 끝난 뒤에도 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음악 잡지 화보나 콘서트 팸플릿도 귀했습니다. 표지에 실린 사진 한 장을 오려 책받침 뒤에 붙여두던 손길, 친구와 어느 소절이 더 좋은지를 두고 다투던 쉬는 시간의 기억도 이 목소리와 함께 남아 있습니다.

공연장을 직접 찾아간 이들의 기억은 조금 더 선명합니다. 좁은 소극장 안, 스피커에서 울리는 저음보다 무대 위 목소리가 더 크게 느껴지던 밤이었다고들 말합니다. 앙코르를 외치는 소리에 다시 마이크를 잡던 순간, 객석은 한동안 조용해졌다가 이내 박수로 들끓었습니다.

‘얼굴 없는 가수’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을까

음반은 계속 팔리는데 얼굴은 좀처럼 낯설던 가수, 김현식을 두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방송 출연보다 클럽과 소극장 무대를 우선하던 활동 방식이 만든 이미지였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온 모습보다 카세트테이프 재킷의 흐릿한 사진으로 먼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화면 속 인물이 아니라 스피커 속 목소리로 먼저 각인된 몇 안 되는 가수였습니다.

가요 프로그램의 화려한 무대 연출보다 클럽의 좁은 조명 아래가 더 잘 어울렸던 셈인데, 그 선택이 오히려 그를 다른 가수들과 구분 짓는 특징이 됐습니다. 방송에 자주 나오지 않아도, 노래만으로 사람들 사이에 이름이 퍼져나갔습니다.

짧았던 시간, 남겨진 마지막 노래

1990년 3월 5집이 나왔고, 타이틀곡은 ‘넋두리’였습니다. 이어 곧바로 6집 녹음에 들어갔는데, 목소리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주변 사람들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지병으로 김현식은 199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습니다.

6집 수록곡 가운데 하나가 오태호가 쓰고 만든 ‘내 사랑 내 곁에’였습니다. 목이 잠겨 음이 갈라지는 구간이 그대로 남은 가이드 녹음이었고, 미완성으로 남은 부분은 동료들의 손을 거쳐 다듬어진 뒤 이듬해 1991년 1월 세상에 나왔습니다. 지금도 이 곡을 두고 많은 이들이 그의 대표곡으로 꼽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fnEsPUT3jWI
내 사랑 내 곁에(1991) — 김현식 6집

부고가 알려진 날, 라디오 방송국에는 그의 노래를 틀어달라는 전화가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정확한 통화량을 확인할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해 겨울 라디오에서 유독 그의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기억하는 이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음악 동료들과 팬들의 발길도 오래 이어졌다고 전해집니다. 함께 무대에 섰던 후배 가수들 사이에서 그는 오랫동안 존경의 대상으로 남았고, 인터뷰나 방송에서 그의 이름과 창법을 언급하는 후배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면 1980년대 중후반은 대학가와 거리가 술렁이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크고 작은 사회적 격변 속에서도 록카페와 소극장 무대에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젊음을 풀어내는 음악이 계속 흘렀고, 김현식의 목소리도 그 배경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10주기, 30주기마다 후배 가수들이 그의 노래를 다시 부르는 헌정 음반이 나왔습니다. 2000년에는 10주기를 맞아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한 음반이 나왔고, 2020년 30주기에도 비슷한 기획의 컴필레이션이 발매됐습니다. 매번 참여진이 바뀌어도 곡목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추억 만들기’ — 결국 사람들이 다시 찾는 곡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헌정 무대가 되풀이되는 걸 보면, 록도 발라드도 아닌 그 중간의 목소리가 30년이 넘도록 다른 가수로 대체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언더그라운드 클럽에서 시작한 목소리 하나가, 세대를 넘겨가며 계속 소환되는 몇 안 되는 경우입니다.

후배 가수들이 매번 이 곡들을 다시 고르는 이유를 물으면, 대답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흉내 내기 쉬운 창법이 아니고, 그 갈라진 음색이 곡의 감정과 정확히 맞물려 있기 때문이라고들 말합니다.

음원 사이트 댓글 창에도 발매 연도보다 한참 뒤에 태어난 이름들이 눈에 띕니다. 부모의 카세트테이프로 먼저 들었다는 사람도 있고, 헌정 무대 영상을 보고 뒤늦게 찾아 들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대를 건너뛰어 닿는 목소리라는 게, 이런 댓글들을 보면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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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속 한 장면

여름밤, 창문을 열어둔 방 안으로 라디오 소리가 흘러들던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선풍기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 틈으로 낯익은 전주가 시작되면, 누군가는 볼륨을 조금 더 키우고 누군가는 그냥 눈을 감았습니다. 노래가 끝나도 한동안 방 안은 조용했습니다. 다음 곡이 시작될 때까지, 그 몇 초의 여백이 유독 길게 느껴졌습니다.

김현식이 남긴 목소리

데뷔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김현식은 허스키한 창법으로 가요와 록 사이의 새로운 길을 냈습니다. ‘비처럼 음악처럼’으로 대중에게 각인됐고,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었던 ‘내 사랑 내 곁에’로 지금도 라디오에 흐릅니다.

록카페의 쪽지 신청곡부터 공테이프에 눌러쓴 곡목까지, 그의 목소리를 붙들어두려던 방법은 저마다 달랐지만 향하는 곳은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스트리밍 버튼 하나로 언제든 다시 들을 수 있지만, 그 편리함이 그때의 절실함을 대신해주지는 않습니다. 어렵게 구한 테이프 한 개를 아끼며 듣던 마음과, 검색 몇 초 만에 재생되는 지금의 마음은 결이 다릅니다.

비처럼 음악처럼, 여름밤의 꿈, 내 사랑 내 곁에 — 세 곡을 나란히 놓고 들어보면 한 사람의 목소리가 얼마나 다른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목소리를 어느 계절, 어느 골목에서 처음 만나셨나요. 그 기억이 남아 있다면 댓글로 들려주셔도 좋겠습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