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훈아 vs 남진, 그 시절 라이벌 무대는 정말 뜨거웠을까

완행열차가 서던 작은 간이역, 스피커에서 노래 한 소절이 흘러나오면 플랫폼에 서 있던 사람들이 잠깐 걸음을 멈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고향역 – 코스모스 피어 있는 정든 고향역.” 그 한 소절이면 충분했습니다. 보따리를 든 손도, 뛰어가던 발걸음도 잠시 그 노래에 붙들렸습니다.

나훈아는 1966년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가요계에 이름을 올렸고, 1972년 발표한 ‘고향역’으로 무명 가수라는 꼬리표를 완전히 떼어냈습니다. 이후 58년 동안 무대에 섰고, 2025년 1월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열린 마지막 공연을 끝으로 마이크를 내려놓았습니다.

목소리가 처음 전파를 탄 순간

데뷔 초반의 나훈아는 지금 알려진 것처럼 곧바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가수가 아니었습니다. 오아시스레코드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했지만, 이렇다 할 히트곡 없이 무명 시절을 꽤 오래 견뎌야 했습니다.

당시 신인 가수들이 대부분 그랬듯, 방송국 복도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지방 공연장을 전전하며 얼굴을 알리는 게 전부였습니다.

1968년 발표한 ‘내 사랑’이 그나마 그의 존재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이 곡을 시작으로 조금씩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1970년에는 ‘두 줄기 눈물’로 MBC 10대 가수에 이름을 올립니다.

이듬해인 1971년에는 ‘가지마오’가 크게 히트하며 KBS 음악대상을 받습니다. 무명에서 벗어나는 데 오 년 가까운 시간이 걸린 셈이니, 결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스타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해, 나훈아의 이름 석 자를 완전히 다른 무게로 만든 노래 하나가 나옵니다.

고향역, 무명을 갈랐던 노래 한 곡

1972년 발표된 ‘고향역’은 명절마다 고향으로 향하던 완행열차 안 풍경과 그대로 겹쳐지는 노래였습니다. 도시로 떠나온 사람들에게 이 곡은 정보가 아니라 감정 그 자체로 다가왔습니다.

기차역 플랫폼, 코스모스가 핀 철길, 오랜만에 마주할 부모님 얼굴. 노랫말 안에 명절 귀성길의 장면이 통째로 담겨 있었습니다.

버스도, 승용차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 명절 귀성은 곧 완행열차를 의미했습니다. 표를 구하려 밤새 역 앞에 줄을 서고, 입석으로 몇 시간을 서서 가던 그 여정에 이 노래가 배경음악처럼 깔렸습니다.

이 곡을 계기로 나훈아는 완전히 다른 위치의 가수가 됩니다. 1987년 KBS ‘쇼특급’ 무대에서도 ‘고향역’과 ‘잡초’를 이어 부른 기록이 남아 있는데, 데뷔 이십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관객을 압도하는 무대였습니다.

서울역이나 청량리역 대합실에 붙어 있던 명절 귀성 안내 방송, 그 틈으로 흘러나오던 라디오 소리. 그 소음 속에서도 ‘고향역’ 전주만큼은 유독 또렷하게 들렸다고 떠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훈아 – 고향역 + 잡초, KBS 쇼특급 1987년 10월 3일 방송분

남진과 나훈아, 그 시절 라이벌 무대

1970년대 가요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게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구도입니다. 두 사람은 창법도, 무대 스타일도 서로 달랐습니다.

남진이 경쾌하고 힘 있는 무대를 주로 선보였다면, 나훈아는 비교적 차분한 곡을 고르면서도 무대 위에서는 특유의 꺾기 창법과 다채로운 포즈로 존재감을 만들었습니다. 같은 시대,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진 두 스타였습니다.

1972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나훈아의 꿈’ 공연은 이 시기 그의 무대 욕심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의상만 열 벌 가까이 준비해 트로트부터 팝송, 포크송, 전통 북치기, 창극 한 대목까지 한 무대에 욱여넣은 버라이어티 쇼였습니다.

남진과 나훈아가 이 무렵 나란히 대형 단독 리사이틀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시민회관 앞으로 늘어선 줄, 매진을 알리는 입간판. 그런 풍경이 낯설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기가 많았는지는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종종 회자되는 화제입니다. 다방 손님들끼리, 버스 옆자리 승객들끼리 자연스럽게 편이 갈리던 그런 종류의 논쟁이었습니다.

그 무렵 여성지나 잡지에서는 심심찮게 ‘좋아하는 가수 인기투표’ 지면을 실었습니다. 독자엽서로 표를 던지는 방식이었는데, 남진과 나훈아는 매번 상위권 앙케이트 결과에 나란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순위표 한 장으로 온 동네가 술렁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잡초와 사랑, 다시 돌아온 전성기

모든 인기가수가 그렇듯 나훈아에게도 주춤한 시기가 있었습니다. 1982년 ‘울긴 왜 울어’로 컴백하면서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는데, 이 곡은 나훈아가 직접 작사·작곡한 ‘잡초’와 나란히 동반 히트를 기록합니다.

‘잡초’의 가사는 같은 집에 살던 아이가 쓴 시를 다시 다듬어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화려한 스타의 위치에서 길가에 밟히는 잡초 같은 존재를 노래한다는 게, 그 무렵 청중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이듬해에는 나훈아가 작사·작곡한 ‘사랑’을 발표했습니다. 1986년 KBS ‘나이트쇼’ 무대 영상을 보면,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도 감정을 절제해 부르는 특유의 창법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나훈아 – 사랑, KBS 나이트쇼 1986년 3월 22일 방송분

1987년부터 89년 사이에는 ‘무시로’를 발표했습니다. 일본어 단어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만, 실은 ‘정한 때 없이 수시로’라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 노래 제목 하나에도 이런 오해와 진실이 함께 따라다니는 게 나훈아라는 가수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 발표한 ‘갈무리’ 역시 나훈아 특유의 애수 짙은 창법이 두드러지는 곡으로, 90년대 초반까지 그의 무대를 채운 대표곡 목록에 이름을 올립니다.

가황이라는 별명, 숫자로 남은 나훈아

나훈아를 부를 때 흔히 따라붙는 수식어가 ‘가황’입니다. 노래의 황제라는 뜻인데, 이 별명이 그냥 붙은 게 아니라는 건 발표한 곡의 숫자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히트곡만 120곡이 넘고, 발표한 앨범은 200장을 훌쩍 넘어섭니다. 그 안에는 나훈아가 직접 쓴 자작곡이 800곡 넘게 포함돼 있고, 취입한 곡 전체를 합치면 2600곡 안팎에 이릅니다.

트로트 가수 하면 대개 다른 작사·작곡가가 만든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로만 떠올리기 쉽지만, 나훈아는 상당수 대표곡을 직접 쓰고 직접 부른 싱어송라이터였습니다. ‘잡초’, ‘사랑’, ‘갈무리’, ‘테스형’ 모두 본인이 곡을 쓴 노래입니다.

비슷한 시기 활동한 조용필이 ‘가왕’이라는 별도의 호칭으로 불린 것과 나란히 놓고 보면,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그 시대 가요계 정점에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창법과 무대로 각자의 팬층을 단단히 다졌던 두 정상급 가수였습니다.

가수 한 명의 이름으로 이 정도 분량의 곡을 채운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그 방대한 목록 안에 세대마다 다른 대표곡 하나씩을 갖고 있다는 점도, 그가 유독 오래 불린 이유 중 하나로 꼽힙니다.

애절한 발라드풍 트로트만 부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나는 리듬의 무대, 창극 대목을 흉내 낸 코믹한 순서, 북치기 퍼포먼스까지 한 공연 안에 섞어 넣던 게 나훈아식 무대의 특징이었습니다. 관객 입장에서는 두 시간 넘는 공연 내내 다음 순서를 예측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리어카 노점의 테이프, 다방 신청곡

레코드판을 사기 어려운 형편이라면 청계천이나 시장 리어카 노점에서 파는 복제 카세트테이프가 대안이었습니다. 나훈아의 히트곡만 모은 편집 테이프가 그런 노점 좌판에 늘 빠지지 않고 놓여 있었습니다.

버스 안 라디오, 이발소 스피커, 다방 DJ 신청곡판까지, 어디서나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통로가 있었습니다. 다방에 앉아 종이에 신청곡을 적어 카운터에 건네던 손님들 사이에서도 나훈아 노래는 늘 상위권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스트리밍 순위가 매일 갱신되는 게 아니라, 그 다방 신청곡판에 적힌 손글씨 목록이 인기의 체감 온도를 보여주는 지표에 가까웠습니다.

왜 그는 좀처럼 화면에 나오지 않았을까

대표곡을 줄줄이 가진 가수라면 방송 출연도 잦았을 법한데, 나훈아는 오히려 정반대의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예능 프로그램 출연도, 잦은 인터뷰도 거의 없이 무대에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쪽을 택했습니다.

화면 속에 몸을 자주 비추기보다 공연장 안에서만 온전히 보여주겠다는 태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매일 얼굴을 마주하던 다른 스타들과는 결이 다른 방식으로 대중과 거리를 유지했습니다.

그 공백이 길어질수록 역설적으로 그의 무대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쌓여만 갔습니다.

연예 잡지 한켠에는 종종 ‘요즘 나훈아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류의 짧은 근황 기사가 실리곤 했습니다. 확인된 정보가 많지 않으니 궁금증만 더 커지는 구조였습니다. 화면에 없는 시간이 길수록, 무대 위에 다시 섰을 때의 파급력은 더 커졌습니다.

테스형, 15년 만에 돌아온 화면

2020년 추석, KBS는 코로나로 지친 시국을 달래기 위한 특집으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준비했습니다. 나훈아가 방송 무대에 다시 선 건 이때가 15년 만이었습니다.

무관중, 비대면 촬영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도 이 특집은 전국 시청률 29퍼센트, 순간 최고 41.4퍼센트를 기록했습니다. 오랜만에 화면 앞으로 돌아온 그를 향해 세대를 가리지 않고 채널이 고정됐습니다.

이 무대에서 처음 선보인 신곡이 ‘테스형’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소크라테스를 부르는 애칭 ‘테스형’에 빗대 담아낸 노래였습니다.

나훈아 – 테스형!,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테스형’은 발표 직후 음원 스트리밍이 일주일 만에 3700퍼센트 넘게 뛰었고, 뮤직비디오는 유튜브 국내 인기 뮤직비디오 차트 1위에 오르며 당대 아이돌 그룹들의 영상까지 앞질렀습니다.

중장년층은 물론 20~30대까지 이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부모 세대가 즐겨 듣던 가수의 노래를 자녀 세대가 유튜브로 다시 찾아 듣는, 흔치 않은 장면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회식 자리 노래방 애창곡 목록에도 ‘테스형’이 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부모 세대 애창곡으로만 여겨지던 트로트 한 곡이, 술자리 마이크를 두고 세대 간 경계를 허무는 노래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는 그 시절 이야기

요즘 세대에게는 낯선 표현이 몇 있습니다. ‘리사이틀’은 지금의 단독 콘서트에 해당하는 말로, 가수 한 사람의 이름을 걸고 대형 극장이나 시민회관을 통째로 빌려 여는 공연을 뜻했습니다.

지금은 음원 순위와 스트리밍 수치로 인기를 가늠하지만, 그 무렵에는 시민회관 앞에 줄이 얼마나 길게 늘어서는지, 표가 얼마나 빨리 매진되는지가 인기의 진짜 척도였습니다.

다방 신청곡판이나 리어카 카세트 노점 역시, 검색 몇 초면 원하는 노래를 찾을 수 있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기곡이 퍼져나가던 흔적입니다.

‘트로트’라는 장르 이름 자체도 처음부터 지금처럼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한동안은 ‘뽕짝’이라는 말로 더 많이 불렸고, 세련된 팝이나 포크와 구분 지어 부르는 표현으로 쓰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나훈아, 남진 같은 스타들의 인기가 이 장르 전체의 위상을 함께 끌어올렸습니다.

1980년대 이후 자리 잡은 ‘가요톱텐’ 같은 순위 프로그램도 나훈아가 한창 활동하던 1970년대 초반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인기는 방송 순위표가 아니라 공연장 매진 속도와 레코드 판매량으로 가늠했습니다.

지방 공연 소식이 라디오 예고 몇 마디로 전해지면, 그 소식 하나에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매표소 앞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예매 시스템도 따로 없이, 몸으로 줄을 서서 표를 구하던 방식이었습니다.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가수 브로마이드 목록에도 나훈아 사진은 꾸준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찍은 사진 한 장이 책받침이나 다이어리 표지를 장식하던 시절, 그 목록에서 그의 얼굴이 빠지는 일은 드물었습니다.

58년의 무대, 그리고 마지막 인사

2024년 4월 인천에서 시작된 은퇴 투어 ‘고마웠습니다 – 라스트 콘서트’는 청주, 울산, 창원을 거쳐 전국 곳곳을 돌았습니다. 대전, 강릉, 안동, 진주, 광주, 대구를 지나 그해 12월 부산 벡스코까지 이어진 긴 여정이었습니다.

2025년 1월 10일부터 12일, 서울 올림픽공원 케이스포돔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열린 무대가 이 투어의 마지막이었습니다. 1966년 데뷔 이후 58년 만에 나훈아는 처음으로 완전히 마이크를 내려놓았습니다.

그가 데뷔한 뒤로 오십팔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대통령이 여러 차례 바뀌고 텔레비전이 흑백에서 컬러로, 다시 스마트폰 화면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모든 시간을 관통하며 같은 이름으로 무대에 섰다는 사실 자체가 새삼 놀랍게 다가옵니다.

마지막 무대 위에서 나훈아는 팬들에게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남겼습니다. 화려한 조명과 박수 속에서도, 그 인사말만큼은 담담했다고 전해집니다.

고향역 플랫폼에서 시작해 리사이틀 무대를 거쳐 테스형 신드롬까지,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늘 같은 자리, 무대 위에 서 있었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명절을 앞둔 저녁, 좁은 부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떠올리면 고향역이 먼저 생각난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다 말고 잠깐 손을 멈추고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렸다. 창밖으로는 아직 오지 않은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짧은 순간만큼은 부엌도, 골목도 다 고향역 플랫폼이 되어 있었다.

나훈아가 남긴 것

무명 시절을 견디다 ‘고향역’ 한 곡으로 완전히 다른 가수가 됐고, 남진과 나란히 대형 리사이틀 시대를 열었으며, 15년의 공백 뒤에도 ‘테스형’ 하나로 세대를 넘나든 인기를 다시 증명했습니다.

2025년 1월, 58년의 무대 인생에 마침표를 찍은 뒤에도 라디오에서 ‘고향역’ 전주가 흘러나오면 여전히 걸음을 멈추게 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완행열차가 사라지고 시민회관 자리에 다른 건물이 들어선 지금도, 그 노래 한 소절만큼은 옛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세대를 넘어 다시 불리는 노래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긴 무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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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