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굴리기, 커다란 공 하나에 반 전체가 매달렸던 이유

반환점 팻말 앞에서, 몸통보다 큰 공 하나가 휘청거리며 옆으로 빠지려 했습니다. 앞서 밀던 아이들이 우르르 반대쪽으로 달려가 매달렸고, 공은 잠깐 멈칫하다 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갔습니다. 그 몇 초의 우왕좌왕이야말로 공굴리기라는 종목의 진짜 얼굴이었습니다.

공굴리기는 지름 1미터 안팎의 커다란 공을 반 전체가 밀고 굴려 정해진 코스를 돌아오는 국민학교 운동회의 단체 종목이었습니다. 공은 종이나 비닐로 만들어졌고, 승부는 발이 빠른 몇몇이 아니라 방향을 맞추는 반 전체의 손발에 달려 있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움직이지 않던 공

출발선에 놓인 공은 보기보다 훨씬 다루기 까다로운 물건이었습니다. 누군가 왼쪽에서 밀면 반대편에서는 오른쪽으로 미는 힘이 걸려, 공은 앞으로 나가는 대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기만 했습니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며 방향을 외쳐도 소용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반 아이들 절반은 공 옆에 붙어 밀고, 나머지 절반은 뒤에서 소리만 질렀습니다. 그 소리조차 제각각이라 오히려 더 헷갈렸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우연히 힘의 중심을 잡으면, 공은 거짓말처럼 순순히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 순간의 안도감은 달리기에서 1등을 했을 때와는 또 다른 종류의 기쁨이었습니다.

정신없이 밀다 보면 발등을 밟히거나, 옆 친구와 머리를 부딪는 일도 흔했습니다. 누구 하나 다치라고 그런 게 아닌데도, 다들 공 하나에만 정신이 팔려 서로의 발밑을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굴러가기 시작하면 완전히 다른 무게였다

일단 방향이 잡히고 나면 공은 순식간에 속도를 냈습니다. 아이들 걸음보다 빠르게 굴러가는 공을 따라잡으려 다들 전력으로 뛰어야 했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공은 생각보다 훨씬 컸습니다. 밀던 손을 놓치는 순간 몸 전체로 부딪히듯 넘어지는 아이가 있었고, 그 무게감에 놀라 뒤로 나자빠지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속도가 붙은 공은 방향을 살짝만 잘못 잡아도 트랙 바깥으로 튀어 나가려 했습니다. 그때마다 옆 팀 응원석에서, 자기 팀도 아닌데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선생님들은 이 순간이 가장 조마조마했습니다. 구경하던 아이가 갑자기 트랙 안쪽으로 뛰어들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마이크를 든 선생님이 “물러서요, 물러서!”를 연신 외쳤습니다. 그 다급한 목소리마저 운동회의 한 장면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1960~1980년대 가을 운동회 모습, KTV 다큐 아카이브 영상

반환점을 돌 때는 다들 숨을 죽였다

반환점에 다다르면 분위기가 확 달라졌습니다. 직선으로 굴리는 것과 방향을 트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공을 미는 힘 중 절반은 방향을 바꾸는 데, 나머지 절반은 넘어지지 않게 붙드는 데 써야 했습니다. 자칫하면 공이 반환점 표지를 그대로 들이받고 튕겨 나갔습니다.

몇몇 반은 이 지점에서 공을 놓쳐 거꾸로 굴러가는 낭패를 겪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미리 연습한 반은 반환점에서 눈에 띄게 매끄럽게 방향을 틀어, 그것만으로 관중석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반환점을 앞두고 숨죽이던 그 긴장감은, 줄다리기 마지막 몇 초의 팽팽함과도 닮아 있었습니다.

공이 반 바퀴를 돌아 제 방향을 다시 찾는 순간, 밀던 아이들의 표정도 그제야 조금 풀렸습니다.

반환점 표지 하나를 두고도 벌어지는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상대 반이 표지를 살짝 건드리기라도 하면 “그거 반칙 아니냐”는 항의가 나왔고, 심판을 보던 선생님은 그때마다 잠깐 호루라기를 멈추고 판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지켜보던 사람들

공굴리기 순서가 다가오면 돗자리에 앉아 있던 학부모들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다른 종목과 달리 결과가 몇 초 안에 갈리지 않고, 공이 방향을 잃고 헤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구경하는 재미도 함께 커졌습니다.

자기 반 공이 좀처럼 방향을 못 잡고 제자리를 맴돌면, 관중석에서는 안타까운 탄식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쪽 말고 이쪽!”이라고 소리치는 부모도 있었지만, 그 목소리가 아이들 귀에 닿을 리는 없었습니다.

반대로 반환점을 매끄럽게 돌아 나가는 반이 나오면, 다른 반 학부모들까지 손뼉을 쳤습니다. 승부를 떠나 그 커다란 공이 방향을 제대로 찾아가는 모습 자체가 볼거리였기 때문입니다.

사진기를 든 아버지들도 이 순간만큼은 자리를 못 지켰습니다. 아이가 어느 쪽에 붙어 밀고 있는지 찾으려 트랙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결국 흙먼지 속에서 뒷모습 한 장을 겨우 찍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체육 시간마다 다시 맞춰보던 손발

운동회 전 체육 시간이면 담임 선생님은 반 전체를 공 하나 앞에 세워놓고 연습을 시켰습니다. 누가 어느 쪽에 붙어야 하는지, 반환점에서는 누가 먼저 방향을 틀어야 하는지를 몇 번이고 맞춰봤습니다.

처음 며칠은 연습 때도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공은 여전히 제멋대로 굴러갔고, 넘어지고 부딪히는 아이들 사이로 웃음소리가 더 크게 터졌습니다.

그래도 며칠 지나면 요령이 생겼습니다. 힘센 아이들이 앞쪽에서 방향을 잡고, 나머지는 옆에서 속도만 붙이는 식으로 자리가 정해졌습니다.

학년에 따라 다루는 공의 크기도 조금씩 달랐다고 전해집니다. 저학년은 상대적으로 작은 공을,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훨씬 큰 공을 배정받는 학교가 많았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습니다. 몸집이 작은 저학년이 밀기에도, 큰 공이 지나치게 위험해지지 않게 하기에도 그 편이 나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1982~2000년 순수했던 추억 속 운동회 모음집, KBS 뉴스 부산 아카이브

다락방 속 한 장면

반환점 표지 앞에서 두 팔로 공을 붙들고 버티던 순간이 떠오른다. 공은 내 몸무게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로 밀고 나가려 했다. 겨우 방향을 돌려세우고 나서야, 그제야 등 뒤에서 반 아이들의 함성이 한꺼번에 들려왔다.

알고 보니 이런 사연이 있었다

지금 세대에게는 국민학교라는 이름부터 낯설 수 있습니다. 1996년까지 초등학교를 부르던 이름이고, 그 시절 가을이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이런 단체 종목들로 하루를 채웠습니다.

이런 운동회가 해마다 당연히 열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교부는 1969년 3월 어린이들의 정서교육과 체력향상을 위해 학교 운동회를 적극 권장하고 나섰고, 연 1회 실시를 의무화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 보면 당연한 가을 행사도, 한때는 국가가 나서서 권장하고 의무화해야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1975년 정부는 한 차례 초등학교 운동회를 폐지했다가, 이듬해인 1976년 9월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공굴리기 같은 종목이 해마다 가을 운동장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제도의 변화를 거친 뒤였습니다.

공굴리기라는 이름의 유래나 국내에 처음 등장한 정확한 시점은 뚜렷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종이나 비닐로 큰 공을 만들어 굴리며 겨루는 방식 자체는 여러 나라의 학교 체육대회에서도 비슷하게 찾아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진행 방식도 학교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반 전체가 한꺼번에 매달려 공을 미는 방식이 있었는가 하면, 주자가 한 명씩 나서서 공을 굴려 반환점을 돌고 다음 주자에게 넘기는 계주 형태로 진행하는 학교도 있었습니다. 같은 이름의 종목이라도 학교 운동장 크기와 학생 수에 따라 규칙이 조금씩 다르게 조정됐습니다.

지금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이유

요즘 학교 운동회에서 대형 공굴리기를 만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지름 1미터가 넘는 공이 방향을 잃고 튀어 나가면 다치는 아이가 나올 수 있다는 안전 문제가 가장 크게 작용합니다.

넓은 운동장과 충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도 걸림돌입니다. 몸싸움과 순발력이 필요한 종목들이 하나둘 운동회 순서표에서 밀려나는 흐름 속에서, 공굴리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대신 요즘 학교 체육대회에서는 훨씬 작은 공을 이용한 이어달리기 형태로 명맥만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도 학교체육용품·행사용품 업체 목록에는 지름 1~1.5미터짜리 비닐 공굴리기 공이 여전히 올라와 있어, 완전히 자취를 감춘 종목은 아닙니다.

다만 요즘 체육대회의 공굴리기는 반 전체가 매달리는 대신 몇몇 대표 선수가 나서서 진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는 반 전체의 몫이었던 것이, 지금은 정해진 몇 명의 역할로 좁혀진 모습입니다.

혼자 잘하는 사람이 없던 경기

달리기에는 1등이 있었고, 박 터뜨리기에는 마지막 콩주머니를 맞힌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굴리기에는 그런 주인공이 딱히 없었습니다. 누가 가장 잘 밀었는지, 누가 방향을 정확히 잡았는지는 사실 끝나고 나서도 잘 가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종목이 끝나면 특별히 누군가를 치켜세우는 분위기가 없었습니다. 다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그냥 다 같이 해냈다는 표정만 지었습니다. 상장도, 메달도 따로 없는 경기였습니다.

그런데도 반이 진 날보다 이긴 날의 교실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가 잘했는지 콕 집어 말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반 전체가 다 같이 이겼다는 기분을 더 진하게 남겼는지도 모릅니다.

공굴리기가 남긴 것

혼자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던 공, 반 전체가 매달려야 겨우 방향을 잡던 그 몇 분. 공굴리기는 화려하지 않아도 반 전체의 손발이 맞아야만 끝까지 굴러가던 종목이었습니다.

반환점에서 그 공에 매달려 본 기억이 있다면, 아찔함과 안도감을 함께 나눈 겁니다. 지금은 사진과 옛 영상 속에서나 다시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커다란 공의 무게감만큼은 여전히 손끝에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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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