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에서 ‘종이학’ 전주만 흘러나와도 그 시절이 훅 떠오르는 분 많으시죠? 전영록은 1975년 MBC 드라마 ‘제3교실’ 삽입곡 ‘편지’로 가수 활동을 시작해, 1980년대 내내 조용필의 뒤를 잇는 인기 가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용, 송골매, 김수철, 김범룡 등 다른 ‘2인자’ 가수들이 짧게 반짝이고 사라진 것과 달리, 전영록은 80년대 초반부터 후반까지 꾸준히 히트곡을 내며 롱런했는데, 그 배경에는 가수 이전에 이미 영화배우로 입지를 다졌던 이력이 있습니다.
가수이기 전에, 스크린 속 얼굴이었다
전영록은 1954년 서울에서 배우 황해와 가수 백설희 부부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연예계 집안에서 자란 그는 처음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화배우로 먼저 데뷔했습니다.
20대 초반에는 영화 ‘내 마음의 풍차’에서 주연과 주제가를 동시에 맡을 정도로 연기 쪽에서 먼저 입지를 다졌고, 한 해에 예닐곱 편의 영화를 찍을 만큼 영화배우로서도 확고한 자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가수 활동은 1973년 MBC 드라마 ‘제3교실’에 출연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 드라마 삽입곡 ‘편지’를 직접 부른 것이 계기가 되어, 197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가수로도 활동하게 됩니다.
화면 속에서 연기하던 얼굴이 어느 날 라디오와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도 등장하기 시작한 셈이니, 그 시절 팬들에게는 두 세계를 오가는 낯설고도 신선한 존재였을 겁니다.
가요톱텐과 골든컵, 그 시절 순위의 무게
1980년대 가요계는 조용필이 정상을 지키는 가운데, 그 아래 자리를 두고 여러 남자 가수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기였습니다. 이 경쟁의 무대가 됐던 게 ‘가요톱텐’ 같은 순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매주 방송사가 그 주의 인기곡 순위를 집계해 발표했고, 한 곡이 5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 ‘골든컵’을 받고 그해 ’10대 가수’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음원차트 1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면 안에서, 그리고 학교 안에서 화제가 되는 기록이었습니다.
전영록은 이 무대에서 ‘종이학’,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불티’, ‘아직도 어두운 밤인가 봐’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여중고생들 사이에서 특히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다만 이 대표곡들은 전영록이 직접 작사·작곡한 곡은 아니었습니다.
‘종이학’은 이건우 작사, 이범희 작곡,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는 유명진 작사, 남국인 작곡으로, 당대 최고의 작사·작곡가들이 그의 목소리에 맞춰 곡을 붙여준 결과물이었습니다.
전영록의 대표곡 ‘종이학’은 이후 KBS ‘콘서트 7080’ 무대에서도 여러 차례 다시 불렸습니다.
전영록 – 종이학, KBS 콘서트 7080 2008년 7월 5일 방송분
86~87년, 유독 그에게만 찾아온 최절정기
보통 인기 가수의 절정기는 데뷔 초반에 몰리기 마련인데, 전영록은 정반대의 곡선을 그렸습니다. 데뷔한 지 10년이 넘은 1986년부터 1988년 사이, ‘그대 우나봐’, ‘내 사랑 울보’, ‘하얀 밤에’, ‘저녁놀’ 같은 곡들이 연달아 히트하며 오히려 가수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이 시기 KBS 가요대상에서는 1986년과 1987년 2년 연속으로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짧게 반짝인 다른 2인자 가수들과 달리, 배우 활동까지 병행하며 오래 버틴 끝에 가장 늦게, 가장 크게 정점을 찍은 셈입니다.
그 시절의 히트곡들은 훗날 같은 방송사 무대에서 메들리로 다시 불렸습니다.
전영록 – 내 사랑 울보 ·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 · 불티, KBS 콘서트 7080 2009년 2월 8일 방송분
교실 뒤편의 브로마이드, 라디오 사연 신청
그 시절 전영록은 무대 위의 가수이면서 동시에 교실 뒤편 게시판 한켠을 차지하던 얼굴이었습니다. 서점이나 문방구에서 산 영화·가요 잡지에서 오려낸 그의 사진이 책받침과 다이어리 곳곳에 붙어 있었고, 여학생들은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에 그의 노래를 신청하며 사연을 함께 적어 보냈습니다.
방송에서 신청곡과 사연이 소개되는 순간을 라디오 앞에서 기다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의식 같은 일이었습니다.
편지지 한 장 가득 사연을 눌러 쓰고 우체통에 넣은 뒤, 며칠 동안 그 방송 시간만 기다리던 마음은 지금의 실시간 댓글 문화와는 결이 많이 달랐습니다. 신청곡이 채택될 확률은 낮았지만, 그 낮은 확률이 오히려 기다림을 더 간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화면이 늘어나던 시대, 스타도 늘어났다
전영록이 활동하던 1980년대는 컬러 방송과 컬러TV가 빠르게 보급되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흑백 화면 속 목소리로만 존재하던 가수들이, 이제는 화려한 색감의 무대의상과 표정까지 고스란히 안방으로 전달되기 시작했습니다.
배우와 가수를 오가며 다채로운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었던 전영록에게는, 이런 시각 매체의 확산이 유독 유리하게 작용한 흐름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목소리 하나로 승부하던 시대에서, 무대 위 표정과 몸짓까지 함께 소비되는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에 그가 서 있었던 셈입니다.
지금 세대는 잘 모르는 그 시절 이야기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 수 있는 표현이 몇 가지 있습니다. 당시 ‘2인자’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조용필처럼 압도적인 국민가수 자리를 제외하고 그다음으로 폭넓은 인기를 누리던 가수들을 가리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10대 가수’는 아이돌 그룹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해 가장 인기 있었던 가수 열 명을 선정해 연말 가요대제전 무대에 세우던 방식이었습니다.
왜 유독 전영록만 오래갔을까
같은 2인자 그룹 안에서도 유독 전영록만 롱런한 이유를 하나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노래 하나에만 기대지 않고 연기와 라디오 진행까지 겸했던 다방면 활동, 그리고 발라드부터 청량한 청춘곡까지 폭넓게 소화한 곡 스타일이 자주 그 배경으로 꼽힙니다.
화면 속에서 배우로도, 가수로도 동시에 소비될 수 있었다는 점이 다른 2인자들과 갈린 지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쪽 활동이 잠시 주춤해도 다른 쪽에서 대중과의 접점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는 점도, 결과적으로 긴 활동 곡선을 만든 요인 중 하나로 보입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밤, 이어폰 한쪽씩 나눠 낀 두 친구가 라디오 신청곡 순서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전영록의 노래가 흘러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볼륨을 조금 더 키웠다. 창밖은 이미 캄캄했지만, 두 사람 사이 작은 라디오 불빛만은 환했다. 내일 학교에 가면 또 그 얘기를 할 참이었다.
전영록이 남긴 것
영화배우로 먼저 이름을 알린 뒤 1975년 가수로 데뷔했고, 80년대 초반의 인기를 지나 오히려 10년 넘게 지난 86~87년에 최절정기를 맞은 흔치 않은 롱런 사례. 노래 한 곡에 기대지 않았던 다방면의 활동이, 짧게 반짝이고 사라진 다른 2인자들과 그를 갈라놓았습니다.
데뷔부터 최절정기까지 걸린 그 십수 년의 시간은, 어쩌면 화려한 순간보다 꾸준함이 더 오래 기억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라디오에서 ‘종이학’ 전주가 흘러나오면, 교실 뒤편 어딘가에 붙어 있던 빛바랜 브로마이드 한 장이 떠오르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글: 마이클 잭슨과 빽판의 시대, AFKN으로 스며든 그 시절
최종 업데이트: 202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