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밤 11시, 안방 불은 꺼져 있었지만 텔레비전 화면만은 파랗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린 동생은 이미 잠들었고, 형이나 누나만 이불을 뒤집어쓴 채 화면 앞에 붙어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KBS가 내보내던 드라마는 미국 FBI 요원 두 명이 초자연 현상을 뒤쫓는 이야기, 엑스파일이었습니다. 1993년 9월 미국 폭스(Fox)에서 처음 방송을 시작해 2002년까지 9개 시즌 202편이 이어진 이 드라마는, 국내에서는 KBS를 통해 1994년 10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8년간 방영됐습니다.
낯선 이름 두 개가 처음 전파를 탄 순간
제작자 크리스 카터가 만든 엑스파일은 시작부터 특이했습니다. 주연을 맡은 데이비드 듀코브니와 질리언 앤더슨은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배우였습니다.
초자연 현상을 믿는 요원 폭스 멀더와, 과학으로 모든 걸 설명하려는 회의론자 데이나 스컬리.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눈으로 같은 사건을 들여다보는 구조가 시리즈 내내 반복됐습니다.
사무실 벽에 붙은 낡은 UFO 포스터, 그 아래 적힌 “진실은 저 너머에(The Truth Is Out There)”라는 문구. 대사 한 줄 없이도 이 드라마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짐작하게 만드는 장치였습니다.
주제곡을 맡은 작곡가 마크 스노우는 원래 보이스카우트 캠프파이어에서 흥얼거릴 법한 무서운 곡을 주문받았다고 전해집니다. 신시사이저에 팔꿈치를 얹은 채 에코 이펙트를 걸어보다 우연히 얻은 휘파람 소리가, 그 유명한 오프닝 테마의 정체였습니다.
Mark Snow – The X-Files Theme (Main Title), Official Audio — Rhino 채널
에피소드의 3분의 1가량은 외계인과 정부 음모를 잇는 긴 이야기로, 나머지는 한 회로 끝나는 독립된 괴담으로 짜였습니다. 어느 쪽을 먼저 봐도 크게 상관없다는 점이, 본방을 놓친 시청자에게는 오히려 다행이었습니다.
어두운 지하실에서 흔들리던 손전등 불빛, 담배만 피워대던 정체불명의 남자. 얼굴 없는 권력자처럼 그려진 그 캐릭터 하나가 몇 마디 대사도 없이 시리즈 내내 섬뜩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무엇을 봤는지보다 무엇을 못 봤는지가 더 무섭게 느껴지던 화면이었습니다.
안방극장까지 건너온 8년
엑스파일의 국내 방영은 1994년 10월 KBS에서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월요일 밤 11시, 어른들도 하나둘 잠자리에 들 시간대였습니다. 2001년 무렵부터는 편성이 금요일 자정 전후로 옮겨갔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이 시간대에 방송이 나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편성표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어린이용이 아니라, 늦게까지 깨어 있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였다는 뜻입니다.
화면 속 멀더와 스컬리의 얼굴보다 먼저 익숙해진 건 목소리였습니다. 성우 이규화와 서혜정이 각각 멀더와 스컬리를 연기했는데, 두 사람은 1982년 KBS 성우 공채 17기 동기였습니다. 낯선 외국 배우의 얼굴이 국내 시청자에게 편안하게 다가간 데는 이 목소리의 몫이 컸습니다.
1998년 8월 1일에는 극장판 미래와의 전쟁이, 정확히 10년 뒤인 2008년 8월 13일에는 후속작 나는 믿고 싶다가 국내 극장에 걸렸습니다. 두 편 모두 여름 성수기에 개봉한 셈인데, 브라운관 앞에서만 만나던 두 요원을 큰 스크린으로 보러 가는 일 자체가 팬들에게는 남다른 이벤트였습니다.
The X-Files: I Want to Believe(2008) 극장판 예고편 — 20th Century FOX 공식 채널
비디오 대여점 진열대에도 자리 잡은 이야기
방송 시간을 놓친 사람들이 찾아간 곳은 동네 비디오 대여점이었습니다. 지난 방영분을 통째로 녹화해 빌려주는 가게가 있었고, 인기 있는 회차는 늘 대여 중이라 빈 케이스만 놓여 있기도 했습니다.
영화·연예 잡지에도 심심찮게 이 드라마 소개 기사가 실렸습니다. 낯선 미국 배우 두 사람의 얼굴을 처음 제대로 본 게 그런 잡지 지면을 통해서였다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PC통신 골목에 모여든 사람들
인터넷 다운로드도, 실시간 스트리밍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이텔과 나우누리 같은 PC통신 안에는 엑스필이라는 연합 동호회가 만들어졌습니다.
무명 배우가 나오는 외국 드라마 하나를 두고 이런 규모의 팬덤이 생긴 건 그 시절 흔한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1998년에는 이 현상을 다룬 학술 논문까지 나왔을 정도입니다.
동호회 게시판에는 지난 회차 줄거리를 정리한 글, 인물 관계를 표로 그린 글, 다음 편을 미리 점쳐보는 글이 쉴 새 없이 올라왔습니다. 모니터 하나를 온 가족이 나눠 쓰던 시절, 그 게시판에 접속하는 순서를 두고 형제끼리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회사를 마치고 돌아온 어른들도, 야간자율학습을 끝낸 학생들도 같은 시간에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고 생각하면 어딘가 신기해집니다.
다음 날 아침 교실 풍경도 비슷했습니다. 어젯밤 방송을 놓친 친구에게 요약해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스포일러를 듣기 싫어 귀를 막고 도망 다니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에게 빠져들었을까
멀더처럼 모든 걸 믿어버리는 사람도, 스컬리처럼 끝까지 의심하는 사람도 시청자 안에 함께 있었습니다. 드라마는 그 둘 중 하나를 정답으로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결론을 내리지 않는 이야기 방식이 오히려 다음 회를 기다리게 만들었습니다. 사건은 해결됐지만 진실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 여백이 시청자의 머릿속에서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게 했습니다.
채널 리모컨을 쥔 아버지가 뉴스만 고집하던 집도 있었을 텐데, 유독 이 시간만큼은 별다른 저항 없이 채널이 고정됐다는 이야기가 여럿 전해집니다. 무섭다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게 어른이나 아이나 다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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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믿지 못하던 그 시절
1990년대 중후반 한국은 크고 작은 사건 속에서 정부에 대한 불신이 자라나던 시기였습니다. 의심스러운 발표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농담 삼아 “멀더 스컬리 불러와야겠다”는 말이 오갔다고 전해집니다.
드라마 속 두 요원이 정부 불신의 아이콘처럼 자리 잡은 데는, 이미 자라 있던 불신에 이름 붙일 캐릭터를 시청자들이 스스로 골라낸 측면이 컸습니다.
거창한 정치 드라마로 받아들인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대개는 그저 소름 돋는 수사물로 즐겼고,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지나며 믿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흔들리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정부도, 기업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것들이 무너지는 걸 지켜본 사람들에게, 화면 속 두 요원의 의심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린이들도 정말 이 드라마를 봤을까
심야 시간대 편성만 봐도 짐작할 수 있듯, 애초 어린이를 겨냥한 드라마는 아니었습니다. 부모 몰래 이불 속에서 소리를 줄이고 보다가 들켜서 등짝을 맞았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전해집니다.
그런데도 학교 앞 문구점에는 외계인 그림이 그려진 공책이나 스티커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습니다. 어른들이 보는 드라마의 이미지가 아이들 손에 든 학용품까지 슬며시 흘러들어 있었습니다.
운동장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도 누군가 “저기 회색 외계인이다”라고 외치면 다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곤 했습니다. 진짜 무언가가 나타나리라 믿었던 건 아니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들 조금 진지해졌습니다.
지금 세대에게는 낯선 풍경
그 시절엔 미국 드라마를 통틀어 외화라 불렀습니다. 자막이 아니라 더빙으로 보는 게 당연했고, 방송 시간을 놓치면 그 회차는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재방송이나 다시보기 서비스가 흔치 않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2016년, 14년 만에 새 시즌이 미국에서 제작됐을 때는 국내에서 케이블채널 캐치온을 통해 소개됐습니다. 다시 돌아온 멀더와 스컬리를 향한 반가움을 담은 기사가 여러 매체에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 사이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게시판에 글을 남기고 다음 접속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실시간으로 감상평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같은 두 요원을 바라보는 방식조차 시대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불 꺼진 거실, 텔레비전 불빛만 얼굴에 닿던 밤을 떠올리면 이상하게도 무섭다기보다 아늑했다. 저 화면 속 사람들은 진실을 찾아 헤매고 있는데, 나는 이불 속에서 안전하게 그 이야기를 훔쳐보고 있다는 감각. 다음 주 월요일 밤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엑스파일이 남긴 것
화려한 특수효과도, 완결된 결말도 없이 엑스파일은 8년을 안방에 머물렀습니다. 낯선 배우 둘의 목소리를 성우가 대신 채워주고, PC통신 골목에서 시청자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 방식 전체가 지금 보면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던 그 말은, 정작 진실을 확인할 길이 없던 시절을 살던 사람들에게 묘하게 위안이 되는 문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비디오 대여점도, 하이텔 게시판도, 심야 시간대 편성도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그런데도 그 낡은 방식들이 모여 한 드라마를 8년이나 안방에 붙들어 뒀다는 사실만큼은 여전히 신기하게 남아 있습니다.
여러분은 엑스파일 하면 어떤 장면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담뱃불 붙이던 남자였는지, 스컬리의 손전등 불빛이었는지, 아니면 월요일 밤 이불 속 그 순간이었는지 댓글로 나눠주셔도 좋겠습니다.
확실한 답 하나 없이 8년을 끌고 간 드라마치고는, 남은 기억만큼은 무엇보다 또렷합니다.
최종 업데이트: 2026-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