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밤 11시, 이불을 펴다 말고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돌아와 앉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신시사이저 전주가 흘렀고, 각진 턱에 덥수룩한 머리를 한 사내가 스크류드라이버 하나로 시한폭탄을 만지는 장면이 이어졌습니다.
1986년 11월 5일 MBC가 처음 튼 맥가이버였습니다. 총 대신 클립과 껌, 스카치테이프로 위기를 넘기는 주인공은 그때까지 안방에서 본 어떤 외화와도 달랐습니다.
여기자의 실종, 그 밤의 첫 방송
시즌1 1화 제목은 ‘여기자의 실종’이었습니다. 밤 11시라는 늦은 시간대에 편성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 드라마가 아이들만의 것은 아니었다는 걸 짐작하게 합니다. 야근하고 돌아온 아버지와 막 숙제를 끝낸 자녀가 같은 화면 앞에 나란히 앉는 시간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985년부터 7년간 방영됐고, 국내에서는 그 뒤를 따라 1992년 8월 1일까지 이어졌습니다. 전격 Z작전, 에어울프 같은 다른 외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수요일 밤 시간대를 지켰습니다.
그 목소리는 배한성이었다
맥가이버를 연기한 리처드 딘 앤더슨의 얼굴보다 먼저 각인된 건 성우 배한성의 목소리였습니다. 침착하면서도 여유 있는 그 톤이 없었다면, 스크류드라이버로 폭탄을 해체하는 장면도 지금만큼 태연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겁니다.
손튼 국장 역은 시즌1에서 김현직이, 시즌2부터는 김기현이 맡았고, 걸핏하면 사고를 치는 친구 잭 달튼은 신성호의 목소리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화면 속 외국 배우보다 이 목소리들을 먼저 알아채는 게, 그 시절 더빙 외화를 보던 방식이었습니다.
MBC 맥가이버 시즌1 오프닝 인트로 (1985~86년 방영분)
맥가이버칼, 책가방 속의 로망
극 중 맥가이버가 가장 자주 꺼내 든 도구는 빅토리녹스사의 스파르탄 모델, 스위스 군용 칼이었습니다. 칼날 하나에 드라이버와 병따개, 가위까지 접혀 들어간 그 물건은 방송이 끝난 뒤 한국에서 아예 ‘맥가이버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앞 문방구에 그 칼이 걸리면 남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나쯤 가진 친구는 쉬는 시간마다 둘러싸였고, 칼날을 하나씩 펼쳐 보이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말 자체가 하나 생겼습니다. 궁지에 몰린 상황을 눈앞의 물건들로 그럭저럭 해결해내면, 사람들은 그걸 ‘맥가이버하다’라고 불렀습니다.
수요일 밤, 온 가족의 시간
본방을 놓치면 방법이 없었습니다. 당시 VCR이 있는 집은 드물었고, 다음 이야기를 보려면 꼬박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 일주일 동안 친구들끼리 지난주 에피소드를 다시 얘기하며 다음 화를 기다리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거실 불을 끄고 다 함께 텔레비전 앞에 모이는 순간, 채널 다툼도 그 시간만큼은 없었습니다. 리모컨을 쥔 사람이 굳이 그 채널을 고를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다락방 속 한 장면
수요일 밤 11시를 떠올리면, 이불 속에서 반쯤 눈을 감고도 신시사이저 전주 소리에 다시 눈을 뜨던 순간이 먼저 생각난다. 옆에서 아버지도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 밤만큼은 어른과 아이의 시간이 따로 없었다.
지금 그 오프닝 원곡을 다시 들으면, 신시사이저 특유의 질주감이 새삼 낯설게 다가옵니다.
MacGyver Opening Theme (Randy Edelman, 시즌 1~7 원곡)
그 시절 ‘외화’라는 말
지금의 ‘미드’라는 말은 그때 없었습니다. 지상파가 수입해 성우 더빙을 입힌 해외 드라마를 그냥 ‘외화’라 불렀고, 편성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자막 없이 목소리만으로 몰입해야 했던 만큼, 성우의 연기력이 곧 그 드라마의 절반이었습니다. 배한성의 목소리를 빼면 맥가이버라는 캐릭터도 지금과는 다르게 기억됐을지 모릅니다.
맥가이버가 남긴 것
총 한 번 쏘지 않고도 매회 위기를 넘긴 주인공, 그리고 그 이름을 딴 칼 하나가 문방구 진열대를 채우던 시절. 맥가이버는 방송이 끝난 뒤에도 ‘맥가이버하다’라는 말로 한동안 우리 곁에 남아 있었습니다.
스크류드라이버와 클립 몇 개로 무엇이든 해결하던 그 사내를 기억하는 분이라면, 지금도 서랍 어딘가에 낡은 맥가이버칼 하나쯤 굴러다니고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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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