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춤, 학예회 무대 위에서 가장 떨리던 몇 분의 색동

강당 뒤편 커튼 너머로, 색동저고리를 입은 아이가 쥘부채 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쥐고 서 있습니다. 스피커에서 국악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담임 선생님이 등을 톡톡 두드리며 순서를 알려줍니다. 커튼이 걷히고 조명이 켜지는 그 몇 초, 무대 아래 가득 찬 학부모석에서는 이미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고 있었습니다.

부채춤은 무용가 김백봉이 1954년 창작해 발표한 신무용 계열 창작무용입니다. 궁중무용과 무속 춤사위, 불교 승무의 소맷자락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이후 수십 년 동안 유치원 재롱잔치와 국민학교 학예회 무대에서 가장 자주 오르는 종목 중 하나로 자리잡았습니다.

운동장이 아니라 강당이었다

그 시절 가을 운동회의 계주나 줄다리기가 흙먼지 나는 운동장 위에서 벌어졌다면, 부채춤은 전혀 다른 공간에서 펼쳐졌습니다. 강당이나 체육관 무대, 때로는 유치원 놀이방을 개조한 임시 무대였습니다.

운동장 종목이 반 대항 승부였다면, 이쪽은 순서를 기다리며 무대 뒤에서 숨죽이는 시간이었습니다. 대형을 맞추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먼저 넘어야 할 산은 부모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혼자 실수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재롱잔치와 학예회라는 이름도 조금씩 달랐습니다. 어린이집·유치원에서 열리는 행사는 재롱잔치, 초등학교(국민학교)에서 열리는 행사는 학예회로 불렸습니다.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그 무대 위에 부채춤이 오르는 풍경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색동저고리는 어디서 났을까

부채춤을 추려면 우선 색동저고리와 다홍치마부터 구해야 했습니다. 학교나 유치원이 통째로 대여업체와 계약해 며칠씩 빌려주는 경우가 많았고, 형편이 되는 집은 아예 한복집에 맞춰 짓기도 했습니다.

가정통신문에 “부채춤 의상 대여료 얼마”라는 문구가 찍혀 나오면, 그 봉투를 손에 쥔 아이는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습니다. 부채춤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가 반에서 몇 안 되는 배역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부채는 학교가 일괄로 구입해 나눠주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손잡이에 조 번호를 적은 종이테이프를 붙여, 연습이 끝나면 각자 자기 부채를 찾아 상자에 반납했습니다. 그 상자 속에서 알록달록한 부채 수십 개가 겹쳐 쌓여 있던 모습도 낯익은 풍경이었습니다.

몇 주씩 반복되던 손동작

부채를 펴고 접고, 머리 위로 돌리고, 활짝 뿌리는 동작 하나하나가 생각보다 손에 익지 않았습니다. 교실 한쪽이나 놀이방 바닥에 둥글게 모여 앉아, 선생님이 보여주는 동작을 몇 번이고 따라 했습니다.

부채가 손에서 자꾸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접었다 펼 때 나는 “촤르륵” 소리를 흉내내다가, 정작 자기 부채는 반쯤 펴진 채로 어정쩡하게 멈춰버리는 일도 흔했습니다.

대형을 맞추는 연습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원을 그리며 돌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일렬로 서야 하는 순서에서, 누군가 한 명이 헷갈리면 옆줄 전체가 따라 흐트러졌습니다. 선생님은 그때마다 음악을 처음으로 되돌려 다시 시작했습니다.

무대 위, 몇 분 동안의 색동 물결

드디어 순서가 되어 무대에 오르면, 연습 때와는 또 다른 긴장이 몰려왔습니다. 객석 조명이 어두워지고 자기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순간, 발끝부터 얼어붙는 기분이었다고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음악이 시작되면 부채가 일제히 펼쳐졌습니다. 색동저고리와 알록달록한 부채가 겹쳐지면서, 무대 위에는 순식간에 꽃 모양이나 물결 모양의 대형이 만들어졌습니다. 객석에서는 그 색깔의 향연에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물론 모든 무대가 매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부채를 놓쳐 무대 아래로 떨어뜨리거나, 대형에서 한 걸음씩 어긋난 채로 끝까지 버티는 아이도 꼭 한 명씩 있었습니다. 그래도 객석에서는 그런 작은 실수조차 귀엽다는 듯 웃음과 박수가 함께 터졌습니다.

국립국악원 토요명품공연(2015) 부채춤 — 무대 위에서 부채가 펼쳐지며 대형을 이루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는 공식 영상

객석 맨 뒤에 서 있던 부모님

학부모석이 일찌감치 꽉 차면, 뒤늦게 도착한 부모들은 강당 맨 뒤나 옆 벽에 붙어 선 채로 무대를 지켜봐야 했습니다. 발뒤꿈치를 든 채 목을 길게 빼고, 어느 자리에 있는지도 모를 자기 아이를 찾느라 분주했습니다.

카메라나 캠코더를 든 아버지들은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무대 앞쪽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자기 아이 차례가 지나가고 나면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고, 다음 순서를 준비하는 아이의 부모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는 무언의 배려도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부모들은 무대 옆 출입구 앞에 몰려서서 아이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색동저고리를 입은 채로 뛰어나오는 아이를 번쩍 안아 올리며, 방금 본 무대 이야기를 앞다퉈 물었습니다.

필름 한 통을 다 쓰던 날

학예회나 재롱잔치가 있는 날이면, 아버지는 며칠 전부터 카메라에 새 필름을 넣어뒀습니다. 아이가 무대에 오르는 그 몇 분을 놓치지 않으려고, 평소 아껴 쓰던 필름 한 통을 그날 하루에 다 써버리는 집도 적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까지 온 가족이 함께 오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형제자매가 다른 학년, 다른 순서로 함께 무대에 서는 경우면, 가족들은 두 아이의 순서를 놓치지 않으려고 자리를 옮겨 다니며 두 배로 분주해졌습니다.

그렇게 찍힌 사진은 인화소를 거쳐 며칠 뒤에야 손에 들어왔습니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부채를 펼친 순간의 사진 한 장이, 그해 가족 앨범 맨 앞장을 차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무대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부채 손잡이를 몇 번이고 고쳐 잡던 기억이 떠오른다. 커튼이 걷히던 순간의 그 새하얀 조명, 음악에 맞춰 부채를 펼치던 손끝의 떨림. 박수 소리가 터지고 나서야 겨우 숨을 내쉬었던 그 몇 분이, 지금도 유독 또렷하게 남아 있다.

사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춤

지금 세대는 부채춤을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전통춤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부채춤은 무용가 김백봉이 1954년 11월, 서울 시공관 무대에서 처음 발표한 창작무용입니다.

궁중무용인 태평무의 우아한 몸짓, 불교 승무의 화려한 소맷자락, 무속 무녀의 춤사위 같은 전통 요소들을 하나로 엮어 새롭게 만들어낸 작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추는 독무였습니다.

지금 익숙한, 여러 명이 함께 부채를 펼쳐 꽃이나 물결 모양을 만드는 군무 형식은 1968년 10월 멕시코올림픽 세계민속예술제전에서 한국민속예술단이 선보이며 자리잡았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국내 학교 행사에서도 자연스럽게 여러 명이 함께 추는 군무 형태로 퍼져나갔습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폐회식에서는 아리랑을 주제로 한 공연 중 하나로 부채춤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같은 시기 운동장에서는 곤봉체조 같은 매스게임도 국제 행사 무대에 동원되고 있었습니다. 실내 무대와 운동장, 공간은 달라도 아이들의 몸짓이 국가 행사를 채우던 시절이었습니다.

국립국악원 수요춤전(2016) — 부채춤을 창작한 무용가 김백봉의 춤사위를 재조명한 공식 영상

왜 하필 부채춤이었을까

유치원과 국민학교 입장에서 부채춤은 여러모로 무대에 올리기 좋은 종목이었습니다. 곤봉체조처럼 넓은 운동장과 대규모 인원이 필요하지 않았고, 색동저고리와 쥘부채 몇 자루만 있으면 준비가 끝났습니다.

동작 자체도 어린아이들이 배우기에 크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펴고 접고 돌리는 몇 가지 동작만 익히면, 부채가 겹쳐지는 순간 실제 실력보다 훨씬 화려해 보이는 효과가 났습니다. 서투른 동작도 색동과 부채가 만드는 색감 앞에서는 크게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여자아이들이 주로 맡는 종목이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유치원 재롱잔치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부채춤을 배우는 반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반 전체가 다 함께 나가는 종목이 아니라는 점도 달랐습니다. 선생님이 몇 명을 따로 뽑아 방과 후에 남겨 연습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그 명단에 이름이 오르는 것 자체가 은근한 자랑거리였습니다. 뽑히지 못한 친구들이 부러운 눈으로 연습 장면을 구경하던 것도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지금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들

재롱잔치와 학예회라는 말도, 쥘부채라는 물건도 지금 젊은 세대에게는 설명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재롱잔치는 어린이집·유치원 아이들이 부모 앞에서 그동안 배운 노래·율동·연극을 선보이는 연말 행사를 가리키고, 학예회는 초등학교에서 비슷한 성격으로 열리던 행사를 가리켰습니다.

쥘부채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부채를 뜻하는 옛말입니다. 부채춤에 쓰이는 쥘부채는 대개 한쪽 면에 모란이나 꽃무늬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어서, 여러 개가 겹쳐 펼쳐지는 순간 그 자체로 무대 위의 큰 그림이 됐습니다.

지금도 무대에 오르는 이유

운동장의 곤봉체조나 매스게임이 대부분 자취를 감춘 것과 달리, 부채춤은 지금도 여전히 유치원과 초등학교 학예회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전통 국악 반주 대신 가요를 편곡한 반주에 맞춰 추는 경우도 흔합니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쥘부채를 든 아이들이 무대에 서는 모습 자체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부모들의 손에 필름 카메라 대신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는 것 정도가 달라졌을 뿐입니다.

남은 이야기

커튼 뒤에서 순서를 기다리던 긴장, 손에 익지 않던 부채질, 무대 위에서 펼쳐지던 색동 물결까지. 부채춤은 짧은 몇 분 안에 그 시절 학예회와 재롱잔치의 긴장과 설렘을 가장 진하게 눌러 담던 종목이었습니다.

쥘부채를 손에 쥐고 무대에 서 본 기억이 있다면, 그 조명 아래의 떨림을 함께 나눈 겁니다. 색동저고리 소매 사이로 부채가 펼쳐지던 그 몇 초의 장면은, 사진 한 장 없이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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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