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에 자가용을 가진 집은 한 집뿐이었다. 그 집 아버지가 운전석 옆으로 손을 뻗어 뭔가를 들어 올리면, 골목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던 아이들도 하던 걸 멈추고 그쪽을 쳐다봤다. 차 안에 붙박인 검은 상자에서 뽑아낸 수화기, 그게 그 시절 ‘카폰’이었다.
1984년 5월, 한국이동통신서비스(현 SK텔레콤)가 개통한 카폰은 차량에 고정 설치하는 무선전화였다. 단말기값에 설치비와 전신전화채권 구입비까지 더하면 초기 비용이 400만원 안팎, 그해 현대 포니2 한 대 값(약 350만원)보다 비쌌다.
차 안에 매달린 그 전화기를 다들 ‘카폰’이라 불렀다. 그런데 사람들이 흔히 카폰과 헷갈리는 물건이 하나 더 있다. 손에 들고 다니던 진짜 이동전화, SH-100이다. 둘은 이름도 생김새도, 등장한 해도 달랐다.
차 안에 매달린 검은 수화기
카폰은 말 그대로 차에 설치하는 장비였다. 안테나는 차체 뒤쪽에, 본체는 조수석 옆이나 뒷좌석 사이에 고정됐고, 나선형 선에 매달린 수화기만 손으로 들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통화도 함께 끊겼다.
운전석 창밖으로 삐죽 솟은 안테나 하나만 봐도 다들 그 차가 어떤 차인지 알아봤다. 신호 대기 중에 수화기를 들고 통화하는 옆모습을 곁눈질하는 것도, 그 무렵 골목이나 정류장에서 흔히 보던 풍경이었다.
1980년대 초 카폰을 쓰려면 자동차가 먼저 있어야 했고, 그 위에 몇백만원을 더 얹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카폰은 부와 지위를 드러내는 물건으로 통했다.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말이 카폰을 두고 흔히 따라붙었다.
정부 관용차 몇 대에 무전기식 전화가 실려 있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일반인이 신청해서 쓸 수 있는 상용 서비스로 자리 잡은 건 1984년부터였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구의동 광장전화국 사무실 한 칸에서 직원 서른두 명으로 출발했고, 첫해 가입자는 2,658명에 그쳤다.
가입 신청부터가 만만치 않았다. 전화국을 몇 번씩 오가며 서류를 내고, 설치 기사가 나와 안테나 위치를 잡고 배선을 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공들여 달아놓은 카폰은 세차를 하거나 정비소에 차를 맡길 때조차 신경 써야 하는 애물단지이기도 했다.
카폰으로 거는 통화도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신호가 약한 지역이나 터널, 지하 주차장에서는 뚝뚝 끊기기 일쑤였고, 통화 중에 잡음이 섞여 목소리를 몇 번씩 되묻는 일도 흔했다. 그래도 차를 몰면서 사무실과 연락이 닿는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로서는 신기한 일이었다.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옆자리에 탄 사람은 괜히 숨을 죽이곤 했다.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벨이 울리면 운전 중이던 사람이 급히 수화기를 찾아 더듬거리는 모습도 낯설지 않았다.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 SH-100은 카폰이 아니었다
SH-100은 삼성전자가 1988년 9월, 서울올림픽 개회식에 맞춰 처음 선보인 국내 최초의 자체 개발 휴대전화다. 차량에 묶여 있던 카폰과 달리,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이동전화라는 점이 결정적으로 달랐다.
안테나를 포함한 길이는 40센티미터, 무게는 700~800그램에 달했다. 한 손으로 들면 팔이 금세 저릴 정도였고, 사람들은 이 물건에 ‘벽돌폰’, ‘냉장고폰’ 같은 별명을 붙였다. 소비자 가격은 165만원, 당시 평균 임금이 64만원 안팎이던 무렵이다.
사실 삼성은 SH-100보다 앞서 1986년에 ‘SC-1000’이라는 차량용 무선전화를 내놓은 적이 있다. 수화기를 들지 않고도 통화할 수 있는 스피커폰 기능을 처음 넣었지만, 이것 역시 여전히 카폰이었다.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형태로 넘어간 건 SH-100에 이르러서였고, 이 순간이 한국의 무선통신 단말기 독자 개발이 가능해졌다는 걸 보여준 첫 사례로 남았다. 서울올림픽 개회식에서 IOC 위원 등 귀빈 47명에게 먼저 선보인 뒤, 이듬해부터 조금씩 일반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카폰과 벽돌폰이 갈라서는 그 경계는 방송사 아카이브 영상에도 남아 있다.
휴대폰 한 대가 300만원이던 시절, 카폰과 벽돌폰 — KBS 옛날티비(옛날티비 : KBS Archive)
골목에서 처음 본 벽돌폰
동네에 벽돌폰을 든 어른이 처음 나타났을 때를 떠올리면, 다들 그 물건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표정이 먼저 생각난다. 저게 전화기라고? 손에 쥐고 걸어 다니면서 통화가 된다고? 라디오나 워키토키처럼 보이는 그 검은 덩어리를 두고 다들 한마디씩 보탰다.
안테나를 길게 뽑아 올리고 귀에 갖다 대는 동작 하나에도 어딘가 으스대는 기색이 묻어났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아이들 사이에서는 “우리 아빠도 저거 산다더라”는 허풍 섞인 말이 한동안 돌기도 했다.
차 한 대 값과 맞먹던 물건이니 실제로 손에 넣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텔레비전 광고나 뉴스 화면에 벽돌폰을 든 사람이 비치면, 그 장면 하나로 온 동네가 그날의 화제가 되곤 했다.
가방처럼 어깨에 메고 다니는 형태의 전화기도 있었는데, 벽돌폰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여전히 짐 하나를 더 들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무겁고 크다는 불만은 다음 모델이 나올 때마다 조금씩이나마 줄어드는 방향으로 이어졌고, 몇 해 지나지 않아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크기로까지 줄어들었다.
양복 안주머니에 넣기엔 여전히 두툼했지만, 그래도 차 밖으로 들고 나올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문물 취급을 받았다. 회사원들 사이에서는 아직 흔치 않은 물건을 손에 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은근히 구분되기도 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가 어떻게 안방까지 소개됐는지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시 짚어준 적이 있다.
핸드폰=자동차 1대 값이던 시절, 우리나라 휴대폰 변천사 — MBC 라떼말이야(MSG, MBC 1993년 9월 13일 방송분)
카폰이든 벽돌폰이든, 물건 하나가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던 시절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그 무렵엔 다들 그 잣대를 크게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숫자로 보는 카폰에서 벽돌폰으로
2,658명으로 출발한 카폰 가입자는 1988년 이동전화 서비스가 자리 잡기 전까지 1만여 대 수준으로 늘었고, 1992년 말에는 9만명까지 불어났다. 같은 기간 SH-100으로 문을 연 휴대전화 가입자는 1988년 약 2만명에서 1994년 96만명으로 훌쩍 뛰었다.
1991년에는 휴대전화 가입자 수가 카폰 가입자 수를 앞질렀다. 차에 묶여 있던 전화가 손에 들고 다니는 전화에 자리를 내주는 흐름이 통계로도 뚜렷했다.
1993년 무렵부터는 무선호출기, 이른바 삐삐가 훨씬 저렴한 대안으로 널리 퍼졌고, 1997년 PCS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기기값과 통신료가 낮아져 휴대전화가 정말 ‘누구나 쓰는’ 물건이 됐다. 카폰이라는 이름 자체는 그 무렵부터 서서히 낯설어졌다.
10년 남짓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400만원짜리 특권이었던 카폰이 9만명 수준으로 늘어나는 동안, SH-100으로 시작된 휴대전화는 그보다 훨씬 짧은 기간에 백만명에 가까운 가입자를 모았다. 차에서 손으로, 다시 누구나의 주머니로 옮겨가는 속도가 그만큼 빨랐다.
지금 세대가 잘 모르는 이야기
요즘은 스마트폰 하나로 통화는 물론 결제, 길 찾기, 사진 촬영까지 다 되지만, 그때 카폰과 SH-100은 오직 통화 하나만을 위한 물건이었다. 그마저도 신호가 자주 끊기거나 잡음이 섞이는 일이 흔했다.
지금 아이들에게 700그램짜리 전화기, 40센티미터짜리 안테나를 얘기하면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스마트폰이 당연한 세대에게는, 벽돌 한 장을 들고 다니며 통화하던 풍경 자체가 낯선 옛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충전도 지금과 달랐다. 배터리가 오래가지 않아 몇 시간 통화하면 곧 방전됐고, 집에 돌아오면 커다란 충전기에 통째로 꽂아두는 게 일이었다. 배터리 하나 무게만도 만만치 않아서,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것 자체가 운동 삼아 할 만한 일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왔다.
요금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부담스러운 수준이었다. 기본료에 통화료가 따로 붙었고, 장거리 통화라도 하는 날이면 다음 달 청구서를 펼쳐보기가 겁났다는 이야기도 어른들 사이에서 자주 오갔다. 그러니 웬만한 용건이 아니면 짧게 끊는 게 그 무렵의 불문율이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차창 너머로 안테나 하나가 삐죽 솟아 있는 걸 보면 다들 그 차 쪽으로 눈이 갔다. 운전석 옆 검은 수화기를 귀에 대고 통화하는 옆모습, 그 짧은 순간이 골목 전체의 이야깃거리가 되곤 했다. 몇 해가 지나 벽돌 같은 전화기를 손에 든 사람이 나타났을 때도, 아이들은 여전히 걸음을 멈추고 그 손을 쳐다봤다.
카폰과 SH-100이 남긴 것
진짜 기억에 남는 건 전화기 모양이 아니라, 그 물건 하나가 만들어내던 골목의 술렁임이었다. 차에 매달린 수화기든 손에 든 벽돌이든, 통화하는 사람 하나를 온 동네가 쳐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카폰이 먼저 문을 열었고, SH-100이 그 전화를 차 밖으로 꺼내 들었다. 두 물건 사이에 놓인 몇 년이 지금 우리 손안의 스마트폰까지 이어지는 첫걸음이었다. 이름도, 형태도 달랐던 두 물건을 한데 뭉뚱그려 기억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 어느 쪽이든 결국 “전화를 들고 다니게 됐다”는 놀라움만큼은 다르지 않았을 테니까.
가끔 그 무렵 안테나 뽑는 소리가 떠오른다면, 그건 아마 그 차 옆에 서 있던 자신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손에 쥔 전화기가 얼마나 가벼워졌는지도 그제서야 새삼스레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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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