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운동회 차전놀이, 동채가 기울던 순간의 함성

운동장 한복판, 굵은 나무 기둥 두 개가 서로를 향해 밀려들었습니다. 그 위에 올라탄 대장의 몸이 휘청거릴 때마다 운동장을 둘러싼 아이들의 함성이 한층 커졌습니다. 흙먼지 사이로 청군과 백군의 깃발이 나부끼던 가을 오후였습니다. 평소엔 조용하던 운동장이 그날만큼은 마을 전체가 모인 것처럼 시끌벅적했습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행진곡, 확성기를 든 선생님의 목소리, 그리고 그 사이를 뚫고 나오는 아이들의 함성까지 뒤섞이면 운동장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 됐습니다.

그 종목의 이름은 차전놀이. 동채싸움이라고도 불렸고, 원래는 경상북도 안동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던 민속놀이였습니다. 운동회 프로그램 중에서도 유독 아이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순서였습니다.

안동에서 시작된 나무 기둥 싸움

차전놀이의 중심에는 ‘동채’라는 커다란 나무 기구가 있었습니다. 굵은 나무 두 개를 X자 모양으로 엮어 만든 이 구조물 위에 대장이 올라타고, 여러 사람이 동채를 짊어진 채 상대편과 맞부딪히는 놀이였습니다. 상대편 동채의 앞머리를 땅에 닿게 하거나 대장을 떨어뜨리면 이기는 방식이었습니다.

원래 전통 방식대로라면 동채는 20~30척에 달하는 단단한 통나무로 만들어졌고, 앞쪽에는 대장이 잡고 지휘할 고삐까지 달려 있었습니다. 그 정도 규모를 학교 운동장에서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었으니, 다루기 알맞은 크기로 줄인 미니어처 버전이 실제 종목으로 쓰였습니다.

안동 지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후백제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지역에서 맞붙었을 때 안동의 세 장군이 왕건을 도와 승리한 것을 기념해 시작된 놀이라고 합니다. 진짜 역사적 기록으로 남은 유래는 아니고,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강변 백사장에서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벌이던 이 놀이는, 일제강점기에 한때 금지됐다가 광복 후인 1958년에야 다시 열릴 수 있었습니다. 1969년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정식으로 기록되고 보존되는 놀이가 됐습니다.

차전놀이 1972년, 국립무형유산원 아카이브 영상

운동회 종목이 된 전통 놀이

이 전통 놀이가 국민학교 운동회 종목으로 들어온 건 원형 그대로는 아니었습니다. 원래 안동의 차전놀이는 25~40세 남자 수백 명이 동원되는 큰 규모의 행사였는데,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다룰 수 있는 크기로 줄이고 규칙도 간단하게 손봐서 치렀습니다.

어느 학교가 언제부터 이 종목을 운동회 프로그램에 넣기 시작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다만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여러 국민학교가 지역 전통을 살린 종목으로 차전놀이를 채택했던 것으로 보이며, 지역색이 강한 만큼 모든 학교에서 볼 수 있는 종목은 아니었습니다.

체격과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한 종목이다 보니, 주로 3~6학년 남녀 어린이들이 참가했습니다. 저학년은 응원석에서 지켜보며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는 쪽이었습니다.

고학년이 되어 마침내 차전놀이에 뽑히는 건 나름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체육 시간마다 담임 선생님이 몇 명을 불러 동채를 짊어지는 연습을 시켰고, 어깨에 나무가 닿는 감촉에 익숙해질 때쯤 운동회 날이 다가왔습니다. 대장 역할은 몸이 가볍고 담력 있는 아이가 맡는 경우가 많았고, 그 자리를 두고도 은근한 경쟁이 있었습니다.

1989년 경북 군위군 산성국민학교의 운동회를 다룬 지역 방송 보도를 보면, 그해 차전놀이는 동부와 서부로 편을 갈라 팽팽하게 맞붙었고 결국 서부가 승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같은 날 할머니들이 담배 한 대를 태우고 나서야 달리기에 나서는 장면이나, 운동장 풀밭에 옹기종기 모여 도시락을 먹는 모습까지 전해지는 걸 보면, 차전놀이는 그 시골 운동회 하루를 채운 여러 풍경 중 하나였습니다.

면장과 이장까지 참석하는 마을 행사였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학교 담장 밖 마을 사람들에게도 운동회는 자녀나 손주를 보러 오는 날이자, 오랜만에 온 동네가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었습니다. 차전놀이 승부가 갈리는 순간에는 학생들 못지않게 어른들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1994년 경산중앙국민학교 가을운동회 차전놀이, 실제 촬영 영상

이 영상 속 아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채 위에 올라탄 대장을 향해 반 친구들이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고, 승부가 갈리는 찰나에는 화면 밖 어른들의 웃음소리까지 함께 섞여 들어갔습니다. 화질은 흐릿해도, 그 함성만큼은 지금 봐도 선명하게 전해집니다.

운동장 위의 짧고 격렬한 승부

경기가 시작되면 순식간에 함성이 커졌습니다. 양쪽 동채가 가까워질수록 대장을 태운 아이들의 얼굴에는 긴장이 스쳤고, 부딪히는 순간 동채를 짊어진 아이들의 발이 땅을 파고들 듯 버텼습니다.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양쪽 진영이 동시에 움직였습니다. 동채를 멘 아이들은 어깨가 빠질 듯한 무게를 견디면서도 한 발 한 발 상대편 쪽으로 밀고 들어갔고, 대장은 그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으려 온몸에 힘을 줬습니다.

승부는 길게 가지 않았습니다. 한쪽 동채가 기울고 대장이 손을 짚거나 떨어지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이기는 순간 터지는 함성과, 지는 순간 어깨를 늘어뜨리던 모습이 같은 운동장 안에 나란히 있었습니다.

진 편 아이들도 오래 풀 죽어있지는 않았습니다. 어차피 다음 순서로 이어지는 다른 경기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흙투성이가 된 체육복을 툭툭 털며 다음 구경거리를 찾아 자리를 옮겼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운동장 흙바닥에 주저앉아 그 대결을 지켜보던 오후가 떠오른다. 우리 학년 차례가 아니었는데도 목이 쉬도록 응원했다. 동채가 기울던 순간 옆자리 친구와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만국기 아래, 운동회의 다른 풍경들

차전놀이가 있던 날은 대개 운동회 전체가 마을 잔치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운동장 둘레로 만국기가 걸리고, 아침 일찍 어머니들이 싸 온 김밥과 도시락이 돗자리 위에 펼쳐졌습니다.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응원하던 함성은 오전 내내 운동장을 채웠습니다.

운동회 날 아침은 평소보다 일찍 시작됐습니다. 며칠 전부터 어머니가 준비해둔 김밥 재료, 다림질까지 마친 체육복, 그리고 이마에 두를 청군 또는 백군 머리띠까지 챙기고 나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오전 순서에는 달리기와 박 터뜨리기, 부채춤 같은 종목들이 이어졌고, 오후로 갈수록 계주와 차전놀이처럼 승부가 뚜렷한 종목들이 배치됐습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프로그램 속에서 아이들은 자기 학년 순서가 다가올 때마다 옷매무새를 고쳐 잡았습니다.

계주 마지막 주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결승선을 향할 때의 함성과, 차전놀이에서 동채가 기울던 순간의 함성은 비슷한 결이었습니다. 둘 다 그날 하루 중 가장 큰 소리였습니다.

지금은 보기 힘든 종목

차전놀이는 힘도 필요하고 다칠 위험도 있는 종목이라, 지금의 학교 운동회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기마전 같은 몸싸움 종목들도 비슷한 이유로 하나둘 운동회 프로그램에서 빠졌습니다.

안전 기준이 달라진 탓도 있지만, 학교 운동회 자체의 성격이 바뀐 영향도 있습니다. 예전처럼 온 동네가 모이는 하루 종일 행사보다, 짧고 안전하게 끝내는 행사로 무게 중심이 옮겨간 겁니다.

대신 그 자리는 안전하게 다듬어진 단체 게임들로 채워졌습니다. 나무 기둥 두 개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던 그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이제 사진이나 옛 방송 영상 속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 됐습니다.

안동 지역에서는 지금도 매년 축제 형태로 차전놀이가 재현되고 있지만,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직접 동채를 짊어지던 방식과는 또 다른 모습입니다. 관객으로 지켜보는 축제와, 직접 어깨에 나무를 메고 뛰어들던 운동회는 같은 이름이라도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남은 이야기

안동에서 시작된 나무 기둥 싸움이 국민학교 운동장까지 흘러들어와, 한 시절 아이들의 가을 오후를 채웠습니다. 만국기와 도시락, 청군백군 함성 사이에서 차전놀이는 가장 격렬하고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동채가 기울던 그 짧은 순간을 목이 쉬도록 응원해본 기억이 있다면, 운동장의 함성을 함께 나눈 겁니다. 어깨에 남았던 나무의 무게든, 목이 쉬도록 응원하던 함성이든, 그 가을 오후는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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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