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몰래 속삭이는 말을 옆반 아이가 알아듣기라도 하면 누군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야, 너 소머즈냐?” 1976년 MBC 전파를 타고 처음 방영된 이 드라마 한 편이, 청각 예민한 사람을 가리키는 별명 하나를 이렇게 오래도록 남겼습니다.
6백만불의 사나이에서 갈라져 나온 이야기
원제 The Bionic Woman은 미국에서 인기리에 방영되던 6백만불의 사나이의 스핀오프로 새로 만들어진 드라마입니다. 주인공 제이미 소머스는 원래 스티브 오스틴의 옛 연인으로, 6백만불의 사나이 에피소드 한 편에 먼저 등장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낙하산 사고로 크게 다친 제이미는 양다리와 오른팔, 오른쪽 귀를 기계 장치로 대체하는 수술을 받습니다. 그렇게 또 한 명의 인공 신체 요원이 탄생했습니다.
스티브 오스틴과 달리 시력이 아니라 청력을 대체한 설정은, 두 드라마가 겹치지 않게 각자의 개성을 살리려는 의도로 읽힙니다. 같은 세계관 안에서도 전혀 다른 능력을 지닌 두 영웅이 공존한 셈이었습니다.
국내에는 MBC를 통해 1976년 10월 22일부터 매주 금요일 밤 10시 35분에 방영됐습니다. 배우 린제이 와그너가 연기한 이 캐릭터를, 국내 더빙판에서는 성우 주희가 그 목소리를 오롯이 채웠습니다.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두 드라마가 비슷한 시기에 안방극장을 오갔다는 점도 특이했습니다. 스티브 오스틴과 제이미 소머스가 서로의 드라마에 잠깐씩 등장하는 회차가 나오면, 아이들은 유독 반가워했습니다.
평소 한쪽 드라마만 챙겨보던 아이들도 그런 회차만큼은 절대 놓치지 않으려 했습니다. 두 주인공이 한 화면에 함께 등장하는 순간이 그만큼 특별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The Bionic Woman’ Opening Theme HQ – FULL ORIGINAL
오른쪽 귀 하나로 세상을 엿듣다
제이미가 지닌 능력은 스티브 오스틴의 그것과는 성격이 조금 달랐습니다. 힘과 속도보다, 아주 작은 소리까지 남김없이 잡아내는 예민한 청각이 이 캐릭터의 핵심이었습니다.
벽 너머 대화, 멀리서 들리는 발소리까지 놓치지 않는 설정은 아이들에게 신기하고 부러운 능력이었습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는 몸짓 하나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매회 등장했습니다.
화면 속에서 제이미가 손을 귀 가까이 살짝 대고 집중하는 그 순간이면, 시청자들도 덩달아 숨을 죽이게 됐습니다. 정작 화면 속 소리는 그대로인데도, 연출만으로 긴박함이 전해지는 게 늘 신기했습니다. 그런 사소한 연출 하나에도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쉽게 몰입했습니다.
이 설정 덕분에 ‘소머즈’라는 이름은 이후 청각이 유독 예민한 사람을 가리키는 별명으로 굳어졌습니다. 지금도 작은 소리를 잘 알아듣는 사람에게 이 별명을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실 뒤편에서 선생님 몰래 소곤소곤 떠들다 걸리면 “쟤 소머즈야?”라는 농담이 어김없이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정작 걸린 이유는 단순히 목소리가 컸을 뿐인데도, 다들 웃으며 그 별명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드라마 캐릭터의 특징이 아예 하나의 관용어로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드라마 자체를 몰라도 이 별명만큼은 아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이 캐릭터가 남긴 흔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옆방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를 알아듣고는 손으로 귀를 감싸며 “소머즈 귀”라고 장난치던 형이 생각난다. 진짜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없었지만, 그 흉내만으로도 한참을 깔깔거렸다. 귀를 쫑긋 세우는 시늉 하나로 온 방이 시끄러워지던 저녁이었다.
인공 신체라는 낯선 상상
사람의 몸 일부를 기계로 바꾼다는 설정 자체가 그 시절 기준으로는 파격적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로봇이나 사이보그 이야기가 흔하지만, 그 당시에는 무척이나 낯설고 신기한 상상이었습니다.
수술을 통해 초인적인 능력을 얻는다는 이야기는 아이들 사이에서 온갖 상상을 낳았습니다. 혹시 자기도 어딘가 다치면 이런 능력을 얻을 수 있을지 사뭇 진지하게 궁금해하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물론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었지만, 그런 상상을 진지하게 나누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습니다.
넘어져서 무릎이 까진 날이면 “이제 나도 소머즈처럼 되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주고받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진짜로 그렇게 믿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 상상 하나로도 다친 아픔이 한결 덜해졌습니다.
소머즈와 6백만불의 사나이, 커플 놀이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두 드라마다 보니, 아이들 사이에서는 스티브 오스틴과 제이미 소머스를 짝지어 노는 놀이가 흔했습니다. 한 명은 힘, 한 명은 귀를 맡아 역할을 나누며 놀았습니다.
학교 앞 문구점에는 두 드라마의 캐릭터가 함께 그려진 딱지나 스티커도 팔렸습니다. 두 주인공이 나란히 그려진 그림은 특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딱지를 모으는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 두 캐릭터가 함께 그려진 그림이 유독 귀했습니다. 서로 다른 드라마의 주인공이 한 장에 담긴 딱지는 몇 장을 얹어야 겨우 교환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귀한 딱지 한 장을 손에 넣으면 며칠 내내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공책 표지나 필통, 지우개 같은 학용품에도 종종 이 그림들이 인쇄돼 팔렸습니다. 학용품 하나에도 당시 좋아하던 캐릭터를 담아 다니던,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습니다.
남매나 짝꿍끼리 역할을 나눠 흉내 내는 놀이도 흔했습니다. 한쪽은 느린 화면으로 뛰는 시늉을, 다른 한쪽은 귀에 손을 대고 엿듣는 시늉을 하며 서로의 능력을 겨뤘습니다.
누가 스티브 오스틴을 할지, 누가 제이미 소머스를 할지를 두고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대개는 형이나 오빠가 힘센 역할을 차지하고, 동생은 귀 밝은 역할을 맡는 식이었습니다. 억울해하며 다음번엔 역할을 바꾸자고 끝까지 조르는 동생도 흔했습니다.
더빙 성우의 목소리로 완성된 캐릭터
화면 속 배우의 얼굴만큼이나, 국내 더빙 성우의 목소리가 이 캐릭터를 완성했습니다. 침착하면서도 단호한 말투는 원어보다 오히려 더 인상 깊게 남았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외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드라마 역시 원어 억양보다 더빙 목소리로 먼저, 그리고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훗날 자막판을 접하고 나서야 원래 배우의 목소리를 처음 듣고 낯설어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더빙 목소리가 이미 그 캐릭터의 진짜 얼굴이 되어버린 뒤였습니다.
The Bionic Woman Opening Titles (1st episode) 1976
린제이 와그너, 여전사 이미지를 만든 배우
제이미 소머스 역을 맡은 배우 린제이 와그너는 이 배역 하나로 단숨에 이름을 널리 알렸습니다. 강인하면서도 다정한 캐릭터를 자연스레 오가는 연기가 시청자들에게 오래도록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당시로서는 여성이 액션의 중심에 서는 드라마 자체가 흔치 않았습니다. 힘이 아니라 예민한 감각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여성 주인공이라는 점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액션 드라마의 주인공이라 하면 대개 남성 배우를 먼저 떠올리던 시절, 여성 주인공이 매회 위기를 스스로 풀어가는 모습은 낯설면서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이 점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자주 오갔습니다.
남자아이들 못지않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팬이 많았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금요일 밤, 온 가족이 모이던 시간
매주 금요일 밤이면 텔레비전 앞으로 가족이 모여드는 집이 많았습니다. 한 주의 마지막 평일 저녁이라는 것도, 이 드라마를 편하게 즐길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다음 날이 주말이라는 여유 덕분에, 아이들도 늦게까지 방영을 보고도 크게 눈치 보지 않았습니다. 그 시간만큼은 유독 부모님도 마음을 놓고 너그러워지곤 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일찍 자라는 잔소리를 들었겠지만, 금요일 밤만큼은 늘 예외였습니다.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켜도 크게 혼나지 않는 하루였습니다.
여자아이들의 새로운 영웅
그 시절 방송에서 여성이 주인공을 맡는 액션물은 흔치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영웅 서사가 남성 캐릭터 중심으로 흘러가던 때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등장한 제이미 소머스는 여자아이들에게 특별한 인물이었습니다. 힘이 아니라 섬세한 감각으로 위기를 풀어가는 모습이, 기존 영웅상과는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학교에서 장래 희망을 이야기할 때, 이 드라마를 보고 자란 여자아이 중에는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구체적인 직업이라기보다, 씩씩하고 당당한 이미지 자체에 끌린 것이었습니다.
운동장에서도 남자아이들 틈에 끼어 함께 뛰어놀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이 드라마 이야기는 자연스러운 대화 소재였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서로 이 캐릭터의 멋진 장면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공감대를 나눴습니다.
그 시절이 남긴 흔적
스핀오프로 시작해 독자적인 인기를 얻은 드라마, 그리고 별명 하나로 남은 예민한 청각까지. 소머즈는 6백만불의 사나이의 그늘에 머물지 않고 자기만의 뚜렷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지금도 누군가 작은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들으면, 그 별명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여전히 이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드라마는 잊혀도 그 별명만큼은 꽤 오래도록 살아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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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