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밥상을 물리기도 전에 텔레비전 채널부터 돌리던 손이 있었습니다. 화면 가득 야자수와 수영장, 낯선 색의 사물함이 늘어선 복도가 펼쳐지면 그제야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미국 FOX에서 1990년 10월 4일 첫 방송된 베벌리힐스의 아이들(원제 Beverly Hills, 90210)은, 국내에서는 MBC를 통해 1990년대 초반 시즌 3까지 일요일 오후 5시 10분에 방영됐습니다.
일요일 오후, 처음 전파를 탄 순간
미네소타에서 이사 온 쌍둥이 남매 브랜든과 브렌다 월시가 베벌리힐스라는 낯선 동네에 적응해 가는 이야기. 제작자 대런 스타와 아론 스펠링의 손을 거친 이 드라마는 미국에서만 10시즌, 2000년 5월까지 십 년을 이어갔습니다.
국내 방영 초반에는 성우 더빙판으로, 후반부로 갈수록 한국어 자막판으로 전파를 탔습니다. 일요일 오후라는 시간대 자체가 특별했습니다. 다음 날 학교 갈 걱정 없이 늘어져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저녁이었기 때문입니다.
MBC 자료 화면 속 베벌리힐스의 아이들 인트로 음악이 흐르면, 채널을 붙잡고 있던 손이 자연스레 리모컨을 내려놓았습니다.
토요일 저녁부터 다음 날 편성표를 미리 확인해두던 습관도 이 드라마 때문에 생겼습니다. 신문 텔레비전 편성란에서 제목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어보던 손끝이 떠오른다.
방학이 되면 평일 낮 시간대로 재방송이 붙기도 했습니다. 본방송을 놓친 회차를 그렇게 뒤늦게 챙겨보며 줄거리를 서로 맞춰보던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학교 앞 문방구까지 번진 잡지 표지
서점 한쪽 하이틴 잡지 코너에는 이 드라마 배우들의 얼굴이 표지를 장식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브로마이드가 딸려 오는 호는 유독 먼저 팔려나갔습니다.
친구들끼리 그 브로마이드를 나눠 갖거나, 책받침 뒷면에 끼워 넣고 다니는 모습도 흔했습니다. 필통 안쪽에 작게 오려 붙인 사진 한 장을 자랑하듯 보여주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몰래 돌려 보던 잡지가 선생님 손에 걸려 압수당하는 일도 종종 벌어졌습니다. 종례 시간이 끝나기 무섭게 교무실로 되찾으러 뛰어가던 다급함이 지금도 떠오른다.
[옛날TV] MBC 베버리힐즈의 아이들 intro
낯선 얼굴, 낯선 공기
화면 속 고등학생들은 이쪽 교실 풍경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자기 차를 몰고 등교하고, 파티에서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연애 감정을 감추지 않고 드러냈습니다.
브랜든 역의 제이슨 프리스틀리, 브렌다 역의 섀넌 도허티, 그리고 딜런 역의 루크 페리. 이 세 얼굴은 국내 하이틴들 사이에서도 금세 낯이 익었습니다. 켈리 역의 제니 가스, 도나 역의 토리 스펠링, 데이비드 역의 브라이언 오스틴 그린까지 더해지며 화면 속 무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이뤘습니다.
가장 눈길을 끈 쪽은 단연 딜런이었습니다. 반항적인 눈빛과 오토바이,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말투가 브랜든의 반듯함과 대비를 이루며 묘한 매력을 만들었습니다. 두 남학생의 성격이 정반대라는 점이 시청자들의 취향을 자연스레 갈라놓았습니다.
교실 뒤편에서는 “너는 브랜든파냐, 딜런파냐”를 두고 은근한 편 가르기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짝꿍끼리 다투듯 각자의 취향을 밀어붙이던 그 실랑이를 떠올리면 웃음부터 난다.
연습장 귀퉁이마다 남던 낙서
수업 시간 짬짬이 연습장 귀퉁이에 딜런이나 브렌다의 이름을 적어보던 손이 있었습니다. 영어 알파벳으로 이름 하나 써보는 것 자체가 은근한 설렘이었습니다.
필통이나 다이어리 겉면에 배우 이름을 새겨 넣은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친구도 흔했습니다. 베벌리힐스의 아이들 등장인물 이름을 두고 별명을 붙여 부르는 장난도 한동안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짝을 이뤄 역할놀이를 하듯 등장인물 흉내를 내는 일도 있었습니다. 누가 브랜든을 맡고 누가 딜런을 맡을지를 두고 신경전이 벌어지는 날도 있었습니다.
청바지와 데님재킷, 화면 밖으로 번진 것들
화면 속 인물들이 즐겨 입던 옷차림도 화제였습니다. 청바지에 데님재킷을 겹쳐 입은 캐주얼한 조합, 크롭톱과 헐렁한 셔츠를 넘나드는 스타일이 미국 현지에서 하나의 유행으로 번져나갔습니다.
국내에서는 그 옷차림을 그대로 따라 입기보다, 화면 속 분위기 자체를 동경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미국 학생들의 자유로운 옷차림과 말투를 흉내 내 보려는 손짓 정도가 교실 안에서 오가는 게 전부였습니다.
브랜든처럼 뒤로 슬쩍 넘긴 앞머리를 따라 해보려던 남학생도 있었고, 딜런의 무심한 말투를 흉내 내다 선생님께 한소리 듣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90년대 초반 국내에서도 청바지에 청재킷을 함께 걸치는 옷차림이 하이틴들 사이에서 낯설지 않게 퍼져 있었습니다. 화면 속 인물들의 조합이 그 흐름과 자연스레 겹쳐 보였다는 기억도 전해집니다.
보수적인 교실과 부딪힌 화면 속 자유
수영장 파티, 거리낌 없는 스킨십, 어른 없이도 척척 알아서 지내는 십 대들의 생활. 이런 장면들은 국내 시청자들에게 신선하면서도 어딘가 아슬아슬하게 다가왔습니다.
보수적인 학교 문화와 화면 속 개방적인 성 문화 사이의 간극이 유독 컸습니다. 부모님 옆에서 보다가 슬쩍 채널을 넘겨야 했던 장면도 적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벌리힐스의 아이들은 국내에서 시즌 3까지만 방영되고 전파를 내려놓았습니다. 이질적인 요소가 많다는 이유가 뒤따랐습니다.
더 보고 싶은 마음과 별개로, 일요일 오후 그 자리가 다른 방송으로 채워지던 날이 왔습니다. 이유를 정확히 알던 아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 궁금해하던 아이들은 한동안 서로에게 묻고 다녔습니다. “그거 왜 안 나와?” 라는 질문이 한동안 교실 여기저기서 맴돌았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국내 드라마나 다른 외화로 자연스럽게 관심이 옮겨갔습니다.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유독 그 이름만은 한동안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일요일 오후 5시가 다가오면 리모컨을 미리 손에 쥐고 광고가 끝나기만 기다리던 시간이 떠오른다. 화면 속 야자수 그늘과 수영장은 우리 동네 어디에도 없었지만, 그 낯선 풍경 하나로 한 시간이 통째로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인트로 음악이 흐르면 방 안 공기마저 살짝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못 본 회차는 친구 입으로 채우던 시절
본방송을 놓친 날이면 다음 날 등굣길부터 마음이 급했습니다. 먼저 본 친구를 붙잡고 어젯밤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듣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브렌다와 딜런 사이가 어떻게 됐는지, 이번 화에서 누가 새로 등장했는지. 짧은 쉬는 시간 동안 친구 입을 빌려 줄거리를 재구성하다 보면 수업 시작종이 울리기 일쑤였습니다.
지금처럼 다시보기 버튼 하나로 해결될 문제가 그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짧은 요약 하나에도 다들 귀를 바짝 기울였습니다.
이야기를 전해주는 친구의 말투마저 조금씩 극적으로 부풀려지곤 했습니다. 실제 화면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각색된 줄거리를 듣고서야 다음 방송을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거실 텔레비전 한 대를 두고 벌어지던 실랑이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거실 한 대뿐이던 시절, 채널권은 늘 협상의 대상이었습니다. 일요일 오후 5시가 다가오면 미리 자리를 맡아 앉아 있는 게 그나마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부모님이 다른 프로그램을 보고 싶어 할 때는 애원하듯 매달리기도 했습니다. “이번 편만 보고 바꿔줄게요”라는 약속은 대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서는 누가 리모컨을 쥐느냐로 사소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겨우 쟁취한 한 시간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지금 세대에게 낯선 이 드라마의 무게
지금은 해외 드라마를 스트리밍 앱에서 원하는 시간에 골라 보지만, 그 시절에는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텔레비전 앞을 지켜야만 볼 수 있는 방송이 전부였습니다. 다음 회차를 일주일 내내 기다리는 일 자체가 하나의 놀이였습니다.
2019년에는 원년 배우 다수가 다시 뭉친 리부트 소식이 알려지며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 세대를 지나서도 이 이름이 다시 불려나온다는 사실 자체가, 이 드라마가 남긴 흔적의 크기를 짐작하게 합니다.
제목의 우편번호 ‘90210’이 무슨 뜻인지 몰랐던 아이도 많았습니다. 베벌리힐스 지역의 실제 우편번호라는 걸 뒤늦게 알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원제 그대로 숫자만 덩그러니 붙은 제목보다, 국내에서 붙인 베벌리힐스의 아이들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더 친숙하게 남았습니다. 그 이름 석 자만으로도 화면 속 야자수와 수영장이 떠오른다.
Beverly Hills, 90210 | Every Opening Credits Intro | Paramount+
브랜든과 딜런이 남긴 것
미국 FOX라는 신생 방송사를 키워낸 이 드라마는, 지구 반대편 한국 안방에도 짧지만 뚜렷한 자국을 남겼습니다. 시즌 3에서 멈춰야 했던 사정마저도, 그만큼 새롭고 낯설었다는 증거로 남았습니다.
딜런 역의 루크 페리는 2019년 세상을 떠나며 다시 한번 이름이 불렸습니다. 화면 속에서만 만나던 얼굴 하나가 사라졌다는 소식에, 오래전 채널을 붙잡던 손끝을 떠올린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일요일 오후 5시 10분이 되면 채널부터 맞춰놓고 기다리던 그 습관, 브랜든이냐 딜런이냐를 두고 벌이던 실랑이. 베벌리힐스의 아이들을 떠올리면 방송 자체보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먼저 그려집니다.
그 시절 짧게 스쳐 간 방송 하나가, 다 자란 뒤에도 문득 인트로 음악 몇 소절로 되살아나는 걸 보면 신기하다. 시즌 3에서 멈춘 방송이었지만, 그 세 시즌만으로도 기억할 거리는 충분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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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