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초여름, 극장 매표소 앞으로 아이 손을 꼭 붙든 부모들이 줄지어 서 있던 풍경이 있었습니다. 표를 사려는 줄 치고는 유난히 아이들 목소리가 컸습니다. 매표구 창 너머로 어른들이 몇 번이고 인원수를 다시 세는 동안, 아이들은 벌써 포스터 앞에 붙어 손가락으로 그 못생긴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걸린 영화는 쭈글쭈글한 외계 생명체가 지구 소년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 이티였습니다. 그해 6월 23일 국내 개봉해 서울에서만 61만 8천 명 넘는 관객을 모았고, 그 숫자는 1984년 한 해 국내 흥행 1위 기록이었습니다.
매표소 줄 뒤편에서는 벌써 이 영화 이야기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정작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는데도, 손가락 끝에 빛이 켜진다는 그 장면만은 다들 알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2년 늦게 도착한 외계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이 영화는 미국에서 1982년 여름 개봉했습니다. 정작 한국 관객이 극장에서 이티를 만난 건 그로부터 꼬박 2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수입 과정에서 시간을 오래 끌었다고 전해집니다. UPI코리아와 현진필름이 수입을 맡았고, 우여곡절 끝에 개봉이 성사됐습니다. 외화 한 편이 태평양을 건너 안방까지 오는 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2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습니다. 그사이 미국에서 이 영화가 얼마나 큰 화제를 모았는지, 소문만으로도 여러 차례 한국까지 흘러 들어왔습니다. 정작 스크린으로는 볼 수 없으니 그 갈증은 더 커졌을 겁니다.
막상 뚜껑을 열자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그해 국내 흥행 1위였고, 역대 기록으로 놓고 봐도 1979년 국도극장을 채운 취권의 흥행에 이어 두 번째 자리였습니다. 홍콩 무술 영화의 벽을 완전히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어린이가 주인공인 SF 영화 한 편이 그 정도 관객을 모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례적이었습니다.
E.T. The Extra-Terrestrial – Trailer / 채널: Universal Pictures At Home (공식)
영화보다 먼저 온 이야기
정작 흥미로운 대목은 따로 있습니다. 이티가 극장에 걸리기 전, 한국 아이들은 이미 이 외계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개봉이 늦어지는 2년 사이, 이 이야기는 다른 통로로 먼저 한국에 스며들었습니다. 어린이 만화잡지 『보물섬』에 관련 만화가 실렸고, 아동극 무대에도 올랐습니다. 국내에서 만든 창작 애니메이션과 노래까지 나왔다는 기록이 학술 연구로도 남아 있습니다.
만화방이나 도서 대여점에서 그 잡지를 넘기다 이티 얼굴을 먼저 마주친 아이도 있었을 겁니다. 극장 개봉 소식은 그다음에 따라왔습니다.
영화 한 편이 정작 극장에 걸리기도 전에 이미 만화로, 무대로, 노래로 여러 갈래로 퍼져나간 셈이었습니다. 그러니 극장 개봉일이 왔을 때는 손가락 끝에 빛이 켜지는 그 외계인을 모르는 아이가 오히려 드물었습니다.
지금이라면 예고편 하나로 영화 정보가 순식간에 퍼지는 시대입니다. 그때는 방송 프로그램 한 꼭지, 잡지 연재 한 편이 그 역할을 대신했고, 정작 원작 영화는 한참 뒤에야 도착했습니다.
라디오와 안방을 채운 이티
1983년, 그러니까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도 전에 국내에서 음반 하나가 나왔습니다. 산울림이 음악을 맡고 배한성이 내레이션을 입힌 ‘이티 이야기’였습니다.
이 음반에 실린 노래 ‘외계인 이티’는 아이들 사이에서 꽤 불렸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멜로디를 흥얼거리면서도, 정작 영화는 아직 보지 못한 아이가 많았습니다. 가사도 모른 채 멜로디만 따라 부르던 경우도 흔했습니다.
텔레비전도 이 열기에 한몫했습니다. MBC 어린이 프로그램 ‘모여라 꿈동산’에 이티 인형이 등장해 그날 에피소드의 주인공 노릇을 했습니다. 인형 하나가 브라운관 안에서 살아 움직이던 그 장면을 떠올리면, 화면 앞에 바짝 붙어 앉아 있던 거실 풍경이 먼저 생각납니다.
영화, 음반, 텔레비전. 서로 다른 매체가 같은 얼굴 하나를 두고 앞다투어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처럼 온라인으로 정보가 오가던 시절이 아닌데도, 이 정도로 여러 갈래에서 동시에 화제가 된 캐릭터는 흔치 않았습니다.
40 Years of E.T. The Extra-Terrestrial – “I Saw Him!” Extended Preview / 채널: Universal Pictures At Home (공식)
문방구 진열대의 작은 외계인
극장 개봉 이후 학교 앞 문방구 진열대 풍경도 조금 달라졌습니다. 이티 얼굴이 그려진 딱지와 공책, 스티커 같은 것들이 나왔다는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정확히 어느 회사가 언제부터 이런 상품을 냈는지까지는 남은 기록으로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못생긴 얼굴 하나가 필통 뚜껑에도, 공책 표지에도 붙어 다녔다는 것만은 여러 사람의 기억이 겹칩니다.
친구가 새로 산 공책 표지에 그 얼굴이 그려져 있으면 한 번쯤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시절이었습니다. 값싼 스티커 한 장 사는 데도 백 원짜리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고민했습니다.
진열대 유리 너머로 그 얼굴을 몇 번이고 훑어보다가, 결국 다른 걸 사고 돌아선 아이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다음 용돈날까지 그 자리에 남아 있어 주기를 은근히 바라면서요.
자전거를 타고 보름달 앞을 가로질러 날아오르는 장면은 이 영화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오래 남았습니다. 그 실루엣 하나만 봐도 무슨 영화인지 알아채는 아이들이 교실에 꼭 있었습니다.
손가락 끝을 마주 대며 “이티, 홈”이라 말하던 그 대사를 흉내 내는 아이들도 흔했습니다. 정확한 발음은 저마다 달랐지만, 손가락을 맞대는 몸짓만큼은 다들 비슷했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그 몸짓을 흉내 내며 낄낄대는 무리가 교실 한구석에 늘 있었습니다.
가족이 함께 앉았던 드문 풍경
그 무렵 극장가에서 온 가족이 함께 표를 끊는 일은 흔치 않았습니다. 성인 취향의 액션물이나 무협물이 상영관을 채우던 시절이라, 부모와 어린 자녀가 나란히 앉을 만한 영화 자체가 많지 않았습니다.
이티는 그 드문 예외였습니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볼 이유가 있는 영화였다는 점이 입소문을 더 넓게 퍼뜨렸습니다. 아이 손을 잡고 극장에 들어선 부모 중에는, 정작 자신이 더 눈물을 훔쳤다는 사람도 적지 않았습니다.
학교에서 단체로 관람했다는 기억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선생님 인솔 아래 줄지어 극장에 들어가 앉았던 그 오후를 떠올리면,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는 이야기가 함께 따라옵니다.
불이 켜진 뒤에도 자리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관객이 많았습니다. 옆자리 아이가 눈이 벌게진 채 앉아 있으면, 부모는 굳이 왜 그러냐고 묻지 않고 그냥 손을 잡아주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 한국 극장가와 이티
그 무렵 국내 극장가에서 외화는 대개 액션이나 전쟁물이 강세였습니다.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SF 가족영화가 흥행 상위권에 오르는 일은 흔치 않았습니다.
이티의 흥행은 그 통념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이후 몇 년 사이 스필버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SF·모험 장르 수입작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이야기도 그 시절 극장가를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 종종 나옵니다.
외계인이라고 하면 무섭거나 침략자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던 시절, 겁 많고 순한 외계인 하나가 그 이미지를 뒤집어놓은 셈이기도 했습니다. 침입자가 아니라 친구가 될 수도 있다는 상상은, 그때 아이들에게는 꽤 낯설고도 반가운 이야기였습니다.
다락방 속 한 장면
여름방학 어느 오후를 떠올리면, 마루 끝에 엎드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외계인 이티’를 따라 부르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노래는 다 외웠지만 영화는 아직 못 본 채였다. 손가락 끝을 맞대는 시늉만 하고도 괜히 웃음이 났다.
몇 번이고 돌아온 외계인
이티는 한 번 극장을 스치고 사라진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2002년 4월과 2011년 8월, 두 차례나 국내 극장에 다시 걸렸습니다.
재개봉 소식을 듣고 극장을 다시 찾은 사람 중에는, 어릴 적 부모 손을 잡고 봤던 그 자리를 이번엔 자기 아이 손을 잡고 앉은 경우도 있었을 겁니다. 스크린 속 자전거는 그대로인데, 객석에 앉은 사람의 나이는 그사이 훌쩍 늘었습니다.
2018년 12월 25일에는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크리스마스 특선으로 방송되기도 했습니다. 명절이나 연말이면 이티가 텔레비전 편성표에 슬그머니 오르는 일이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습니다.
존 윌리엄스가 작곡한 영화 음악도 이 영화만큼이나 오래 회자됐습니다. 자전거가 하늘로 떠오르는 장면에서 흐르던 그 선율을, 영화 내용은 가물가물해도 멜로디만은 흥얼거릴 수 있다는 사람이 여전히 많습니다.
재개봉관 스크린 앞에 다시 앉아본 사람이라면 알 겁니다. 화질도, 스피커 소리도 예전과는 다른데, 그 자전거가 달을 가로지르는 순간만큼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이 숨이 멎는다는 것을요.
이티가 남긴 것
영화가 걸리기도 전에 만화와 노래로 먼저 퍼진 외계인, 61만 8천 명이 다녀간 그해 여름 극장, 문방구 진열대에 걸린 못생긴 얼굴 하나까지. 이티는 스크린 안에만 머문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손가락 끝에 켜지던 빛, 보름달을 가로지르던 자전거 실루엣. 그 장면들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그 여름 어딘가에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은 이티를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나셨나요. 극장에서였는지, 아니면 그보다 먼저 라디오나 만화책에서였는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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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업데이트: 2026-08-15
